성만징(成萬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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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59년(현종즉위)∼1711년(숙종37) = 53세]. 조선 후기 숙종 때 활동한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경상도 상주(尙州) 출신이다. 자는 달경(達卿), 호는 추담(秋潭) · 환성당(喚醒堂)이다. 아버지는 성호영(成虎英)이고, 어머니 덕수이씨(德水李氏)는 통덕랑(通德郞)이동야(李東野)의 딸이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인데, ‘강문(江門) 8학사(學士)’의 한 사람이다.

숙종 시대 활동

18세 때까지 형 성헌징(成獻徵)한테 공부하다가, 22세 때 화양동(華陽洞)에 있던 우암(尤菴)송시열(宋時烈)을 찾아갔다. 그러나, 송시열이 나이가 너무 많아서, 그 제자 권상하(權尙夏)에게 사사(事師)하였다. 권상하가 “내가 겪어 본 사람 중에서 가장 가망성이 많다.”라고 김중화(金仲和)에게 보낸 서(書)에서 칭찬했는데, 이것이 『한수재집(寒水齎集)』에 남아 있다. 1696년(숙종22) 조광조(趙光祖)가 봉향된 도봉서원(道峰書院)에 송시열을 함께 배향할 때 정시한(丁時翰) 등이 송시열을 헐뜯으면서 반대하자, 성만징이 경상도 유생들을 거느리고 이를 통렬하게 반박하는 상소를 숙종에게 올렸다. 1703년(숙종29) 내시교관(內侍敎官)에 보임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그때 숙종은 왕자(王子)가 스승에게 글을 배울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사부(師傅)를 신중하게 골랐는데, 노론이 정권을 잡은 시기였으므로, 성만징이 천거되어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었다. 1704년(숙종30) 만동묘(萬東廟) 향사(享事)를 거행할 때 전국에서 성만징을 비롯하여 이간(李柬) · 윤혼(尹焜) 등 137명의 선비들이 모였다. 당시 향사에 대한 시비가 일어나자, 그는 ‘만동사(萬東祠) 시비변(是非辨)’을 지어 만동묘 향사의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1709년(숙종35) 고향 상주(尙州)의 흥암리(興巖里)에서 문경(聞慶) 쌍룡동(雙龍洞)으로 이사하였으나 권상하와 항상 연락하여 1710년(숙종36) 아들 성이홍(成爾鴻)을 권상하에게 보내어 주자(朱子)의 글을 빌려달라고 부탁하기도 하였다. 그 무렵 전염병이 돌아서 그 사촌 동생이 전염병을 걸려서 죽었는데, 차마 멀리 떠나지 못하고 곁에서 지켜보다가, 그도 전염병에 걸렸다. 1711년(숙종38) 1월 15일 전염병으로 갑자기 죽었는데, 향년이 53세였다.

학문의 세계

주자학의 연구에 전력을 기울여서 조예가 깊었는데,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 스스로 터득한 묘체(妙諦)가 많았다. 그는 “성인(聖人)은 동(動)과 정(靜)의 양덕(兩德)을 갖추었으나, 반드시 정(靜)을 위주로 하였는데, 후세 학자들이 정(靜)을 위주로 하는 한 가지를 버린 것은 급선무를 몰랐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또 “정자(程子)가 이른바 ‘정(靜)한 뒤에야 만물이 자연히 봄기운을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음미할 만한 대목이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그렇다면 이는 육상산(陸象山)의 덕성(德性)만을 존중하는 것과 가깝지 않겠습니까?” 묻자, 성만징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이는 수레에 두 바퀴가 있고 새에 두 날개가 달린 것과 같다. 어떻게 하나를 버리고, 수레가 능히 구를 수 있고, 새가 능히 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속학(俗學)들은 다만 문학(問學)만을 일삼고 본원(本源)의 공부에는 미진함이 많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는 송시열의 ‘존왕양이(尊王壤夷)’와 권상하의 ‘친명배청(親明排淸)’을 지지하여 만동묘 향사를 거행하고 서원을 옮기는 데 앞장섰다. 특히 예론(禮論)에 밝아서 권상하 · 이세필(李世弼) 등과 예학(禮學)에 대한 이론적 문답을 주고받았다. 또 「학성도(學聖圖)」를 만들어 후학들에게 학문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저서로는 『가언범록(嘉言泛錄)』 · 『회심록(會心錄)』 등이 있고, 문집으로 『추담문집(秋潭文集)』 3권이 있다.

성품과 일화

성만징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화평(和平)하고 정직하였다. 평소에는 말을 아끼었으나 만일 시비를 논하거나 사정(邪正)을 말할 때에는 맺고 끊는 단호함이 있어서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었다. 집에서는 부모를 섬기는 데에 효성을 다하고, 상(喪)을 당해서는 슬픔을 다하며, 제사에는 정성과 공경을 다하고, 매일 새벽마다 사당에 참배하였다. 우애(友愛)가 지극하여 형수를 어머니처럼 섬기고, 어린 조카를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였다. 사촌 동생이 가난하여 갈 곳이 없게 되자, 전답과 집을 나누어 주면서 조금도 아까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도 상주 서쪽 어산(於山) 오향원(午向原)에 있는데, 스승 권상하가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 문경의 한천향현사(寒泉鄕賢祠)에 제향되었다. 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는 통덕랑홍진대(洪震大)의 딸로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이 성이홍이다. 1741년(영조17) 영조가 성이홍을 “왕자사부의 아들”이라고 하여 직접 불러서 보고 세자익위사 사어(司禦)에 임명하고, 또 경상도관찰사에게 명하여 성이홍의 노모(성만징의 처) 홍씨를 위문하게 하고 궁중 음식물을 보내주었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추담문집(秋潭文集)』
  • 『사계전서(沙溪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한수재집(寒水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