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동묘(萬東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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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에 대한 존주의리(尊周義理)를 기리려는 송시열의 유지에 따라 그 문하생들이 명나라가 망한 지 60년 후인 1704년(숙종 30)에 맞춰 명나라 신종 황제와 의종 황제를 제사하기 위해 충청도 화양동에 세운 사우.

개설

송시열(宋時烈)은 임진왜란 때 군사를 보내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 신종(神宗) 황제의 재조지은(再造之恩)과 1644년 이자성의 반란 때 스스로 목숨을 끊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 황제의 절의를 기리고자 하는 뜻을 남겼다. 1703년(숙종 29)에 송시열의 문하생들은 스승의 유지(遺志)를 받들고자 스승이 말년에 체류한 충청도 청천면 화양동에 의종 황제를 모신 사우(祠宇)를 짓고 그 이름을 만동묘(萬東廟)라 했다.

첫 제사는 명이 망한 1644년 갑신년으로부터 60년이 지나 일주갑(一週甲)이 다시 돌아온 1704년 정월에 맞춰 거행되었다. 만동묘를 관할하는 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은 조정의 지원을 받기도 했으나, 19세기에 들어서는 주변 백성들을 침탈하는 소굴이 되기도 했다. 만동묘는 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1865년(고종 2)에 화양동서원과 함께 철폐되었으나, 대원군이 하야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874년(고종 21)에 복구되었다.

내용 및 특징

1637년(인조 15) 삼전도 항복 이후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하고자 하는 복수설치(復讐雪恥)의 염원으로 북벌(北伐) 준비를 강조하던 송시열은 1666년(현종 7)에 충청도 괴산군 청천면 소재 낙양산(洛陽山) 계곡 일대의 화양동에 허름한 띠집[茅屋]을 짓고 머물렀다. 이후 기회가 닿는 대로 화양동에 들어가 거주하면서 명에 대한 의리 고양 작업에 몰두했다.

송시열은 1674년(현종 15) 화양동 절벽에 ‘비례부동(非禮不動)’ 넉 자를 새겼는데, 이는 민정중(閔鼎重)이 북경에서 가져온 의종황제의 친필로서, 예에 맞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의종황제의 친필 원본은 환장암 옆에 운한각(雲漢閣)을 세워 보관했다. 또한 조선에 재조지은을 베푼 신종황제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을 제사하기 위한 사당을 지으려 계획했으나,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사사(賜死)되면서 문하생들에게 유지로 남겼다.

권상하(權尙夏) 등 송시열의 문하생들은 1695년(숙종 21)에 송시열을 받들어 제사지내고 유학을 강학하는 화양서원(華陽書院)을 세웠다. 또한 송시열의 유지를 받들어, 명나라가 망한 갑신년(1644년)이 다시 돌아오는 때에 맞춰 제사를 지내기 위해 1703년(숙종 29)에 화양동에 신종황제와 의종황제를 위한 사우를 건립했으며, 이듬해인 1704년(숙종 30) 갑신년 정월에 두 황제의 첫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번방(藩邦)의 사대부가 천자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예법에 어긋나 참람하다는 의견도 무시할 수 없어, 위판 없이 지방으로만 제사를 지내고 곧 불태웠다.

만동묘의 건립과 제사는 애초에 조정의 허락을 받지 않고 추진되었는데, 1704년에 숙종의 뜻에 따라 창덕궁 후원에 대보단(大報壇)을 세우는 과정에서 조정의 인가를 받았다. 제향은 매년 음력 3월과 9월에 두 번 거행했다. 이후 영조와 정조에 의해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고 토지에 대해 면세의 혜택을 누리고 임금이 직접 이름을 지어 새긴 편액[賜額]을 받는 등 크고 작은 배려를 받았다. 그러나 만동묘에 대한 국가의 배려는 국가가 점차 만동묘 제사에 개입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만동묘라는 이름은 임진왜란 때 참전한 한인(漢人)의 후손들이 모여 살던 경기도 가평 소재 조종암(朝宗巖)에 새겨진 선조의 어필인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따온 것으로, 그것을 모사한 ‘만절필동’은 만동묘의 편액으로 사용되었으며, 1754년(영조 30)에는 송필중(宋必重)이 모사한 ‘만절필동’을 만동묘 인근의 바위에 새겨 넣었다.

18세기 벽두에서 19세기 막바지에 이르기까지 지방의 만동묘는 중앙의 대보단과 함께 명나라를 상대로 한 조선의 춘추의리가 여전함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재생산하는 주요 장치로 기능했다. 또한 명에 대한 의리를 강조한 송시열계 노론 세력의 지방 거점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는 민생을 침탈하는 소굴로 그 의미가 변하면서, 많은 폐단을 야기하기도 했다.

변천

만동묘는 흥선대원군 집권 기간 중인 1865년(고종 2)에 조정의 명으로 전격 철폐되었다. 만동묘의 철폐는 대보단의 강화와 불가분의 관련이 있었다. 중앙에서 이미 대보단 제례가 성대히 치러지고 있으므로 굳이 궁벽한 시골에 별도의 묘를 만들어 이중으로 제사할 필요가 없다는 명분을 겉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그동안 중앙에서 공적으로, 지방에서 사적으로 거행되어 오던 명나라 황제를 위한 제사를 중앙으로 일원화하겠다는 대원군의 의지에 따른 결과였다. 조선후기 국가의 주요 이데올로기였던 춘추의리 정신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국가 제사를 오로지 중앙에서 독점함으로써 지방의 양반 세력에 대한 왕실과 조정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대원군의 복안이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제사용품은 물론이고 만동묘에 보관되어 있던 명나라 관련 서적들은 모두 대보단의 경봉각(敬奉閣)으로 옮겼으며, 만동묘의 편액도 경봉각으로 옮겨 걸었다.

그러나 대원군이 10년 만에 하야하자, 이항로(李恒老)와 최익현(崔益鉉) 등 유생들의 빗발치는 요구에 따라 만동묘는 본래의 장소에 복구되었다. 그렇지만 만동묘의 제사 과정 일체는 중앙 조정의 직접 지휘 관할 아래 놓였다. 축식(祝式)은 대보단의 규정을 따르도록 했고, 헌관(獻官)에는 해당 지역의 목사를 임명했으며, 집사들은 도내의 수령들이 맡도록 했다. 관련 의례 절차도 모두 예조에서 만들어 내려 보냈다. 또한 제향 횟수도 일 년에 한 번으로 조정하였다. 봄에는 중앙에서 대보단 춘향대제(春享大祭)를 거행하므로 이와 겹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만동묘 춘제(春祭)는 폐지하고 가을에만 한 차례 지내도록 한 것이다.

1894년 갑오경장과 1897년 대한제국 건국 사이에 만동묘는 대보단과 운명을 함께해 법률적으로 철폐와 존속을 거듭하다가,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한 이듬해 1908년에 정식으로 철폐되었다.

참고문헌

  • 『대의편(大義編)』
  • 『소의신편(昭義新編)』
  • 『송자대전(宋子大全)』
  • 『존주휘편(尊周彙編)』
  • 『한수재집(寒水齋集)』
  • 『화양지(華陽誌)』
  • 계승범, 『정지된 시간: 조선의 대보단과 근대의 문턱』, 서강대학교출판부,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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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갑균, 「화양동 사적에 대한 조사 보고」, 『역사교육』11·12,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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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