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상기(選上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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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지방에서 선발하여 서울로 올려 보낸 기녀.

개설

선상기(選上妓)는 조선시대에 각 고을에서 뽑혀 올라온, 재예가 뛰어난 기녀를 가리킨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3년간 서울에 머물며 악가무(樂歌舞)를 익히고, 연향 때 공연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에는 서울에 상주하던 기녀가 혁파됨에 따라, 연향 때마다 두세 달 전에 지방에서 기녀들을 뽑아 올렸다. 이들은 궁중에서 공연 활동을 마치면 바로 본 고을로 되돌아갔다.

내용 및 특징

태종대에는 경상도에서 선상기 6명을 뽑아 후궁인 명빈김씨(明嬪金氏)의 시녀로 삼았다. 이들에게는 금(琴)·슬(瑟)과 가무를 배우게 하였으며, 쌀 3석씩을 내려 주기도 하였다. 또 경상도도관찰사(慶尙道都觀察使)에게 명하여, 김해에서 뽑혀 올라온 기생 옥동선의 부모를 서울로 보내 생업을 돕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2년 10월 28일).

조선시대 후기에 선상기가 궁궐로 올라오는 과정은 이렇다. 먼저 중앙에서 여령(女伶)의 수를 배정하여 지방 감영에 공문을 보낸다. 감영에서는 다시 해당 읍으로 공문을 보내고, 각 읍에서는 수향리(首鄕吏)의 지휘에 따라 여령을 선발한 뒤 그 명단을 우선 궁궐로 보낸다. 각 읍에서 선발된 여령은 감영에 모여 재예를 시험한 다음, 담당자와 함께 말이나 배를 타고 궁궐로 올라간다. 선상기의 나이는 대개 20~30대에 걸쳐 있으며, 평안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가장 많은 여령이 선발되었다. 특히 처용무(處容舞)를 공연할 여령은 경상도 경주와 안동에서, 연화대(蓮花臺) 정재(呈才)동기(童妓)와 항장무(項莊舞)를 연행할 여령은 평안도 지역에서 주로 선발되었다.

선상기들이 가장 시간을 들여 연습한 것은 악장(樂章)이었다. 선상기들이 역(役)을 사는 고을에서 평상시에 춤과 노래를 담당했더라도 궁중의 정재와는 형식과 내용이 달랐으므로, 새로 악장의 가사를 익혀야 했던 것이다.

선상기들이 궁중 안에서 가무를 연습하는 내습의(內習儀)는 나이 어린 세자에게 유혹이 될 수 있으므로 경계해야 한다는 이유로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영조실록』 22년 12월 16일).

선상기들은 정재 공연이 끝나면 곧바로 소속 관아로 되돌아갔다. 영조는 잔치를 마친 이튿날, 포교로 하여금 각 도에서 선발된 기녀들을 도성 문 10리 밖까지 압송하도록 하여(『영조실록』 45년 2월 2일), 종친·무신·유생 등이 관기를 끌어가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 했다. 종신과 무신들이 서로 선상기를 끌어다가 사적으로 쓰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조는 선상된 기생들을 다음 날 아침에 즉시 내려보내기도 했다(『영조실록』 45년 4월 16일). 또 『순조기축진찬의궤(純祖己丑進饌儀軌)』에는, 1829년(순조 29)의 진찬 때 마지막 공연이 2월 13일에 있었는데, 2월 20일에 이미 외방 여령이 본 고을에 도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조 때와 마찬가지로 외방 여령을 급히 돌려보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885년(고종 22)에 편찬된 안민영(安珉英)의 시조집 『금옥총부(金玉叢部)』에는, 해주의 기녀 연연이가 1877년(고종 14) 진연 때 올라왔기에 김군중(金君仲)과 더불어 며칠 동안 밤에 노래와 거문고를 즐기는 모임을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궁중 연향을 위해 상경한 선상기들이 다른 사적인 모임에 참여하기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변천

정재 여령을 선발하는 방법은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원칙적으로 지방에서 선발되어 올라온 일정 수의 여기(女妓)가 한양에 상주하면서, 연향과 각종 의식에서 공연을 담당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의 ‘선상’ 항목에 따르면, 3년마다 여러 고을의 나이 어린 비녀(婢女) 중에서 여기 150명, 연화대 정재를 담당할 기녀 10명, 의녀 70명을 뽑아 올렸다. 이때 여기와 연화대를 담당한 여령은 지방에서 선상되었다는 점에서는 선상기와 동일하지만, 3년간 한양에 상주하며 경기로서 활동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인조반정 이후 조선시대 후기에는 장악원의 여기가 혁파되었으므로, 내연(內宴)을 여는 시기에 맞춰 외방 여기를 뽑아 올렸다가 연향이 끝나면 다시 지방으로 돌려보냈다. 영조 때 편찬된 『속대전(續大典)』에 따르면, 진연 때마다 여기 52명을 선상하였으며, 특별한 지시가 있으면 그 수를 가감하였다. 영조대에만 해도 진연에 참가한 선상기는 1739년(영조 15)에 45명, 1743년(영조 19)에 35명, 1744년(영조 20)에 52명으로 그 수가 달랐다.

1744년의 진연에서는 선상기로만 정재 여령을 선발하였고, 1795년(정조 19)의 진찬에서는 화성의 향기와 경기를 함께 선발했다. 이후 1829년의 진찬과 1848년(헌종 14)의 진찬 및 1877년(고종 14)과 1887년(고종 24)의 진찬에서는 선상기와 경기가 함께 정재를 담당하였다. 선상기의 수는 시기별로 달랐으며, 고종대에는 선상기의 비율이 다른 시대에 비해 낮았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영조갑자진연의궤(英祖甲子進宴儀軌)』
  •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 『순조기축진찬의궤(純祖己丑進饌儀軌)』
  • 『금옥총부(金玉叢部)』
  • 김종수, 『조선시대 궁중연향과 여악연구』, 민속원, 2003.
  • 이종일, 『대전회통 연구: 호전·예전편』, 한국법제연구원, 1994.
  • 박민영, 「‘기생안’을 통해 본 조선후기 기생의 공적 삶과 신분 변화」, 『대동문화연구』 71, 2010.
  • 배인교, 「조선후기 지방 관속 음악인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7.
  • 조경아, 「조선후기 연향 의궤를 통해 본 정재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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