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보역(石堡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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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의 도로망인 수성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함경북도 부령군에 위치했음.

개설

석보역(石堡驛)은 조선 세종 때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세조대에 전국의 역로(驛路)를 41역도(驛道)-543속역(屬驛) 체제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수성도(輸城道)의 속역이 되어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초기인 태조에서 세종 연간에 걸쳐 동북 지방을 개척하고 새로운 역을 설치하면서, 함경도 지역의 역로 조직도 새롭게 편성되었다. 1421년(세종 3)에는 고산도(高山道)·시리도(施利道)·주천도(酒泉道) 등 3개의 역도가 편성되었고, 1440년(세종 22)에는 고산도·수성도·거산도(居山道)의 3도 찰방(察訪) 체제가 마련되었다. 그 뒤 1445년(세종 27)에는 다시 고산도·거산도·화원도(和原道)·명원도(明原道)·연기도(燕基道)의 5도 역승(驛丞) 체제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고산도·거산도·명원도·풍산도(豊山道)의 4도 역승 체제로 바뀌었다. 석보역은 이때 풍산도에 속하였다(『세종실록』 28년 11월 17일).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부령도호부 편에 따르면, 석보역에는 상등마 2필, 중등마 3필, 하등마 11필과, 역리(驛吏) 619명, 역노(驛奴) 168명, 역비(驛婢) 116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1872년(고종 9)에 간행된 『관북읍지(關北邑誌)』에는 마필의 총수는 같지만, 인원수는 역리 448명, 역노 49명, 역비 46명으로 약간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변천

조선초기에는 함경도 지방의 역을 ‘참(站)’이라 불렀는데, 석보역도 석보참이라고 하였다. 그 뒤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제정 및 편찬하는 과정에서 ‘참’을 ‘역’으로 통일하였고, 그에 따라 석보참도 석보역으로 개칭되었다. 세조대 이후에는 함경도의 역로가 고산도·거산도·수성도로 확립되면서, 석보역은 수성도에 속한 역이 되었다. 이후 조선후기까지 존속하였다가,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석보역의 위치는 『여지도서』에는 부령도호부 성내(城內),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부령도호부 동쪽 1리 지점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전국 군현의 지도책인 『광여도(廣輿圖)』 부령부 편에는 마을 오른쪽에 ‘고보(古堡)’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석보역을 잘못 쓴 것이다.

참고문헌

  • 『여지도서(輿地圖書)』
  • 『관북읍지(關北邑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대동지지(大東地志)』
  • 『광여도(廣輿圖)』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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