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보군 이복생(石保君 李福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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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생몰 연대 미상] 조선 전기 세종 때 활동한 왕자. 정종(定宗)이방과(李芳果)의 서출 15남 8녀 중에서 제 9왕자. 봉작(封爵)은 석보정(石保正)인데, 석보군(石保君)에 추증되었다. 호는 검묵당(儉默堂)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윤숙의(尹淑儀)이다. 윤숙의가 낳은 4남 1녀 중에서 셋째아들인데, 동복형은 수도군(守道君)이덕생(李德生), 임언군(林堰君)이녹생(李祿生)이고, 동복아우는 장천군(長川君)이보생(李普生)이고, 동복누이는 인천옹주(仁川翁主)다.

풍류와 음란

1427년(세종 9) 5월 정종의 아들들이 음란한 행위를 하다가 벌을 받을 때, 정윤(正尹) 이복생(李福生)은 원주(原州)로 부처(付處)되었다. 같은 해 9월 직첩(職帖)을 빼앗겼고, 1430년(세종 12) 윤12월 직첩을 돌려받았다. 1436년(세종 18) 10월 황해도 해주로 목욕을 간다고 핑계되고 다른 곳으로 돌아다니다가, 공정대왕(恭定大王)의 기신일(忌辰日)에 춘천에 가서 순평군(順平君)을 사칭하고 여러 날 유숙하면서 기생과 어울렸고 매사냥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종부시(宗簿寺)에서 죄를 줄 것을 청하자, 세종은 그의 직첩을 빼앗고 외방에 귀양보냈다.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에서는 그 죄가 크므로 더 중한 죄로 다스릴 것을 청하였으나 세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1439년(세종 21) 6월 이복동생인 이말생(李末生) 등 다른 형제들과 함께 음란한 짓을 하다가 물의를 일으켰는데, 세종이 경녕군(敬寧君)이비(李裶)를 불러서 종친들의 의견을 물어 본 다음에, 그들을 각각 징계하였다. 1444년(세종 26) 7월 정3품상 명선대부(明善大夫) 석보정에 임명되었다.

검소한 생활

산간에 은거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물아일체의 경지로 검소하게 살았다. 이복생은 평소에 검소한 생활을 묵묵히 하였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검묵당(儉默堂)’이니 ‘검묵공자(儉默公子)’라고 일컬었다. 이로 인하여 ‘검묵’을 호로 삼았다. 호를 검묵당이라 한 것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 철학을 반영하고 있다. 당시 강호(江湖)에 살면서 많은 학문 연구와 시작(詩作)을 하였으므로, 학자와 대문장가로서 존경을 받았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정혜(靖惠)이다. 1872년(고종 9) 3월 석보군에 봉해지고, 곧 영종정경(領宗正卿)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선원계보(璿源系譜)』에서는 경기도 양주 미아리 불당동(佛堂洞)에 있다고 하였고, 『선원강요(璿源綱要)』에서는 충청도 중원군 소태면(蘇台面) 양촌리(陽村里)에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면(淸安面) 조천리(釣川里) 6번지에 위치해 있다. 1906년 석보군가묘(家廟)는 초가집이었으나, 1930년 재건되었고, 1996년에 중수하였다. 1996년 충청북도 문화재 제 16호로 지정되었다.

부인 원주 김씨(原州金氏)는 김연지(金連枝)의 딸인데, 3남 5녀의 자녀를 두었다. 장남은 연산부정(燕山副正) 이칙(李勅)인데, 이연(李*耒+刀,力)이라고도 하고, 2남은 인양부정(仁陽副正) 이정(李整)이다. 3자 곡성부정(鵠城副正) 이금손(李金孫)은 임성정(任城正) 이호생(李好生) 양자로 갔고, 곡성군(鵠城君)이 되었다. 장녀는 성숙(成淑)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송계장(宋季璋)의 처가 되었으며, 3녀는 홍맹손(洪孟孫)의 처가 되었고, 4녀는 손효장(孫孝章)의 처가 되었으며, 5녀는 정윤서(鄭允諝)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명종실록(明宗實錄)』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선원강요(璿源綱要)』
  • 『선원보략(璿源譜略)』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