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엄(徐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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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29년(중종24)∼1573년(선조6) = 45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진지(鎭之), 호는 춘헌(春軒)이다. 본관은 달성(達成)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예조 참의서고(徐固)이고, 어머니 순흥안씨(順興安氏)는 찰방(察訪)안사금(安嗣金)의 딸이다. 중추부 판사서성(徐渻)의 삼촌이고, 퇴계(退溪)이황(李滉)의 문인이다.

명종∼선조 시대 활동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기 전 유학(幼學)일 때 서엄은 임금이 경계할 일에 대해 10가지를 상소하여 진달하였다. 그 내용은 재상을 가려 뽑을 것, 선비의 기상을 배양할 것, 세속이 숭상하는 바를 바로잡을 것, 언로를 넓힐 것, 탐욕스러운 풍조를 진정시킬 것, 민생을 살릴 것, 사치를 금할 것, 상벌을 명확히 할 것, 인재 쓰기를 신중히 할 것, 환관을 억제할 것 등이었다. 명종은 “숨김없이 모두 말하였으니, 곧다고 할 만하다.”고 칭찬하였다. 그는 이 상소로 말미암아 유명해졌으나 당로자(當路者)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1555년(명종10) 진사시(進士試)에서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는데, 이때 생원시에는 윤두수(尹斗壽)가 1등을 차지하였다. 1560년(명종15)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2세였다. 승문원 주서(注書)에 보임되었다가, 예조의 낭관(郎官)을 거쳐, 1566년(명종21) 함경도도사(咸慶道都事)로 나갔다. 1568년(선조1)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사신을 접대하는 역관(驛館)의 가관관(假館官)에 임명되었고, 그 뒤에 성균관 사예(司藝)에 임명되어 유생(儒生)들을 가르쳤다. 1572년(선조5) 안성군수(安城郡守)로 나가, 고을의 자제들을 지성으로 가르쳤는데, 그들 중에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서 현달(顯達)한 자가 여러 사람이 있었다. 그가 떠난 다음에 고을 사람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서 그를 기렸다. 1573년(선조6) 병으로 갑자기 죽으니, 나이가 45세였다.

성품과 일화

그는 학문에 박식하고 문장을 잘 짓는다고 그 명성이 대단하였다. 그는 항상 후학을 가르쳐서 관직에 진출시켰으므로, 한때 이들 중에 그의 가르침을 받고 출세하여 저명하게 된 사람이 아주 많았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재주가 있으면서도 중용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진사시(進士試)에 장원 급제하기 전에 포의(布衣)의 선비로 있을 때 소장(疏章)을 올려서 당시의 폐단에 대해 거리낌 없이 강직하게 비판한 것과 관련이 있었다.

비문과 부인

부인 송씨는 참봉(參奉)송지정(宋之禎)의 딸인데, 자손이 없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고봉집(高峯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조천기(朝天記)』
  • 『청음집(淸陰集)』
  • 『혼정편록(混定編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