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인(私賑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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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곡식을 풀어 기민(饑民)을 진휼한 사람.

개설

조선시대 정부는 흉년이 들었을 때 지방의 부유한 사람에게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도록 장려하고, 개인의 곡식을 내어 빈민을 구제한 사람에 대해서는 진휼이 끝난 후 포상하였다. 이들은 구제한 사람 수나 기증한 곡식량에 따라 관직을 얻거나 공명첩을 받아 신분 변동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부민(富民)이라는 이유로 억지로 개인의 재산을 써 가며 진휼하도록 강요받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1. 사진인의 등장 배경

조선시대 전 기간을 통해 가뭄·홍수와 같은 자연재해, 전란·화재와 같은 인재(人災)가 끊이지 않았다. 재정이 넉넉하지 않았던 조선 정부는 일반 백성을 대상으로 납속(納粟)이나 부민권분(富民勸分) 등의 정책을 통하여 단기간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고자 하였다(『숙종실록』 23년 1월 23일).

한편, 조선후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인하여 부민의 존재가 새롭게 부각되었다. 이들은 넓은 토지를 경작하거나, 농법을 개량하고 상업 작물을 재배하는 등 경제적 노력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또 장시(場市)나 포구에서의 상업 활동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부민들은 납속을 통해 신역(身役)을 면제받거나, 흉년기에 개인의 재산을 내어 진휼하는 사진에 참여함으로써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는 등 사회적 신분 향상을 꾀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정조실록』 7년 1월 18일).

2. 사진인의 신분 구성

조선후기에 나타나는 사진인은 대체적으로 지방에서 경제적인 부를 가진 부민으로 인식되었다. 이들은 수령의 권유나 강요에 의해서 진휼사업에 참여하였고, 10석(石) 이상의 곡식을 납부하여 각 도 감사의 필진장계(畢賑狀啓)에 이름이 올라 정부에 의해 그 존재가 드러난 사람들이었다(『정조실록』 8년 4월 30일).

사진한 사람들은 양반만이 아니었다. 1783년(정조 7) 경상감사이병모(李秉模)의 필진장계에는 흉년에 기민을 도운 보진인(補賑人)이 26명이 확인되었다. 스스로 자신의 재물을 바친 원납인(願納人) 3명을 제외한 23명의 사진인의 신분은 유학(幼學) 8명, 절충장군(折衝將軍)·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직자 5명, 업무(業武) 2명, 한량(閑良) 2명, 양인 6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조선후기 1,000석 이상의 곡식으로 사진한 사람은 주로 중류 계층으로 분류되는 품직자·한량·향품 등이었다. 이들은 정부의 권분(勸分) 모집에 참여하거나 동원됨으로써 향촌사회에서 신분 변동을 꾀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권분의 주 대상이 되어 강제로 권분을 해야 했고 이로써 19세기 민란의 한 축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변천

영조대에 이르면 사진하거나 원납한 곡식량이 50석 이상인 자는 정부에서 포상하고, 50석 미만인 자는 본도에서 시상하도록 하는 원칙이 법제화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구제한 기민의 수나 기증한 곡식의 양에 따라 각종 공명첩을 받아 신역을 면제받았고, 또는 참봉(參奉), 수령, 군문(軍門) 장교(將校), 변장(邊將) 등에 임용되었다. 사진인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회·신분적 지위 향상을 꾀하기도 하였다(『영조실록』 1년 9월 27일).

그러나 정부가 사진에 대한 포상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숙종대에는 사진인의 관직 임용을 약속대로 이행하라는 조치가 빈번한 것을 보면 포상이 제때 시행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정부가 스스로 진휼을 돕도록 한다는 명분하에 부민 침탈의 수단으로 사진을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대전통편(大典通編)』
  • 고석규, 『19세기 조선의 향촌 사회 연구: 지배와 저항의 구조』,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 문용식, 『조선 후기 진정(賑政)과 환곡 운영』, 경인문화사, 2001.
  • 정석종, 『조선 후기의 정치와 사상』, 한길사, 1994.
  • 문용식, 「조선 후기 수령자비곡의 설치」, 『조선시대사학보』 9, 1999.
  • 서한교, 「19세기 진휼 정책과 납속 제도의 추이」, 『역사교육논집』 26, 2001.
  • 서한교, 「영·정조대 납속 제도의 실시와 납속부민층의 존재」, 『조선사연구』 1, 1992.
  • 안병욱, 「19세기 임술민란에 있어서의 「향회」와 「요호」」, 『한국사론』 14, 1986.
  • 이세영, 「조선 후기의 권분과 부민의 실태」, 『역사문화연구』 34, 2009.
  • 서한교, 「조선 후기 납속 제도의 운영과 납속인의 실태」,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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