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시의(賜諡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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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조문사절이 황제가 내려준 시호(諡號)를 조선 조정에 전달하는 의식.

개설

죽어서 받는 이름이 시호이다. 왕의 경우에는 중국에서 내려준 시호와 신하들이 올리는 시호를 받았는데 사시의는 중국에서 내려준 시호를 받는 의식이다. 시호는 왕의 일생에 대한 평가의 의미를 갖기 때문에 왕이 죽으면 먼저 일생을 기록한 행장(行狀)을 지었고 이를 토대로 시호를 결정하였다. 부고를 받은 중국에서는 조선에 조문 사절을 보냈다. 이들이 국상(國喪)을 애도하는 제문과 부의 물품 및 조선에서 요청한 시호와 후계왕의 즉위를 승인하는 문서를 가져 오면 부의 물품을 전달하는 사부의(賜賻儀)를 행하고, 이후 길일(吉日)을 정해 혼전(魂殿)에서 시호를 전하는 사시의(賜諡儀)를 거행하였다.

연원 및 변천

조선시대에 사시의 의례 절차는 전 시기에 걸쳐 큰 변화가 없으나 의례를 거행할 때 입는 옷에서 일부 차이가 있었다. 『세종실록』「오례」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는 동일하게 익선관(翼善冠), 백포(白袍), 오서대(烏犀帶), 백피화(白皮靴)라고 별도로 예복을 정한 반면, 조선후기 영조 때에 편찬한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는 왕이 일상적인 집무를 볼 때 입는 시사복(視事服)으로 되어 있어 기록에 차이가 난다. 이 의례는 조선의 국가 전례(典禮)가 제후의 예를 준용하기 때문에 행하는 절차였으므로 황제국을 선포한 대한제국 시기에는 시행하지 않았다.

절차 및 내용

중국의 조문사신이 가져온 시호를 전달받는 의식이다. 의식을 거행하기 1일 전에 충호위(忠扈衛)에서 혼전 대문 밖에 왕이 임시로 거처할 장전(帳殿)과 사신의 자리를 관직 등급에 맞게 설치한다. 왕명의 전달 등을 맡은 관서인 액정서(掖庭署)에서 황제가 보낸 문서인 고명(誥命)을 놓을 책상과 사신의 자리 및 왕이 대신하여 고명을 받는 자리, 종친과 문무백관 및 집사자(執事者)의 자리를 설치한다. 의식을 거행하는 날에 왕은 익선관을 쓰고, 흰색의 백포에 검은색의 오서대를 착용하고 흰 빛깔의 가죽신[白皮靴]을 신는다. 만약 의식이 졸곡(卒哭) 전에 거행되면 최복(衰服)을 입는다. 문무백관이 사신을 맞이하러 갈 때에는 조복(朝服)을 입고, 의식에 참여할 때는 상복(喪服)인 최복을 입는다(『태종실록』 8년 9월 24일).

의식은 곡하면서 사신을 맞이한 뒤 시호를 받는 행위로 이루어진다. 먼저 문무백관이 중국 사신이 묵고 있는 태평관에 나아가 사신을 혼전 문 앞으로 인도한다. 왕이 곡하면 종친과 문무백관도 함께 곡하고, 왕이 곡을 그치면 함께 곡을 그치고 4번 절한다. 신주(神主)우주(虞主)를 자리에 설치하면 왕이 다시 곡하고 그친다. 혼전 대문 앞에서 왕이 사신을 영접하고 황제의 고명을 미리 설치한 책상 위에 놓는다. 왕이 절하는 자리로 나가 4번 절하고 일어나 대수위(代受位)로 나간다. 왕이 사신에게 받은 고명을 근시(近侍)가 영좌(靈座) 앞에 놓는다. 왕이 엎드렸다가 일어나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4번 절하면 문무백관도 따라한다. 왕은 사신을 혼전 대문 밖까지 배웅한다. 이때 우주는 다시 들여 놓는다. 배웅을 마치고 왕이 곡하면서 들어간다. 왕이 재전으로 들어가 곡을 그치면 신하들도 곡을 그치고 4번 절하고 나간다(『세종실록』 오례 흉례 의식 사시의).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 안희재, 「조선시대 국상의례 연구-국왕국장을 중심으로」, 국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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