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근역(沙斤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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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도 지역의 역도 중 하나인 사근도에 속한 역.

개설

고려시대 성종 때 전국의 525개 역을 22개 역도(驛道)로 편성하는 과정에서 사근역(沙斤驛)은 산남도(山南道)에 소속되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세조 연간에 역제를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하면서 사근도(沙斤道)의 속역으로 편성되었다. 경상도 함양(咸陽)에 위치하였으며, 찰방(察訪)이 파견되어 역무를 관할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高麗史)』 참역 조에 따르면, 사근역은 고려시대 산남도에 소속된 28개 속역 가운데 하나였다. 설치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고려의 역제가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정비된 995년(고려 성종 14)에서 1067년(고려 문종 21) 사이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유린역(有麟驛)·안간역(安澗驛)·임수역(臨水驛)·제한역(蹄閑驛)·정곡역(正谷驛) 등과 함께 사근도에 속하였다.

조직 및 역할

사근역의 조직 구성 상황은 1833년(순조 33)에 편찬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와 1872년(고종 9)에 편찬된 『영남역지(嶺南驛誌)』 등이 남아 있어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다.

『경상도읍지』에 따르면 사근역에는 역리(驛吏) 257명, 일수(日守) 3명, 역노(驛奴) 2명이 배속되어 있었는데, 그 중 직접 신역(身役)을 치르는 사람이 183명, 납공자(納貢者)가 79명이었다. 납공자는 봄과 가을에 각각 1냥씩 매년 2냥을 납부하였으므로, 사근역은 해마다 158냥의 신공을 거두어들였다. 이는 1794년(정조 18)에 편찬된 『부역실총(賦役實摠)』의 기록, 곧 노공전(奴貢錢) 128냥, 비역전(婢役錢) 6냥, 비공급대전(婢貢給代錢) 34냥 3전을 합한 168냥 3전과 큰 차이가 없다. 또 『영남역지』에 따르면. 사근역에는 이방(吏房) 1명, 병방(兵房) 3명, 호방(戶房) 2명, 관청색(官廳色) 2명, 공방(工房) 2명, 형리(刑吏) 3명, 승발(承發) 2명, 통인(通引) 3명, 관노(官奴) 3명, 시사역비자(時使役婢子) 3명, 사령(使令) 10명, 번장(番長) 1명, 구종(驅從) 6명, 보종(步從) 7명이 있었다.

한편 김창업의 『연행일기(燕行日記)』에는 1712년(숙종 38) 연행 당시 사자관(寫字官)오윤찰(吳允札)의 역마부(驛馬夫)로 사근역의 김막금(金莫金)이 배종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역노들이 마부로 차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사근역은 고려시대에 산남도의 속역으로 설치된 뒤 이후 조선시대까지 계승되었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1462년(세조 8)에는 역승(驛丞)이 파견되어 역무를 맡아보았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사근역은 함양군 동쪽 16리에 위치하며, 역승 1명이 파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18세기에 집필된 박지원(朴趾源)의 『연암집(燕巖集)』에는 이덕무(李德懋)는 1782년(정조 6)에 사근도의 찰방으로 부임했을 때 사근역의 오래된 공채(公債) 이자 때문에 고달픈 백성들을 보고 이를 경상도관찰사에게 보고하여 혁파하였다는 일화가 실려 있다. 그러나 1791년(정조 15)에 사근역의 환자(還資) 2,000섬을 탕감해 주었다는(『정조실록』 15년 3월 13일)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사근역민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 『영남역지(嶺南驛誌)』
  • 『부역실총(賦役實摠)』
  • 『연암집(燕巖集)』
  • 조병로, 『韓國近世 驛制史硏究』, 국학자료원, 2005.
  • 정요근, 「高麗前期 驛制의 整備와 22驛道」, 『한국사론』45,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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