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예빈시(分禮賓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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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객(賓客) 의 연향(宴享)과 공궤(供饋)를 맡아보던 관아.

개설

빈객의 연향과 공궤를 담당하던 예빈시(禮賓寺)의 일을 나누어 맡아보던 분사(分司)로 빈객의 연향을 담당하였다. 전구서(典廐署)는 목축(牧畜)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로, 1392년(태조 1)에 예빈시에 합쳐 분예빈시(分禮賓寺)라 일컬었다. 1466년(세조 12)에 사축서(司畜署)로 고쳐 독립하였다. 빈객의 연향에 필요한 물자를 미리 마련하기 위하여 돼지 등을 길렀다.

변천

1392년(태조 1)에 목축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인 전구서는 예빈시에 합쳐 분예빈시라 하였고, 1406년(태종 6)에 다시 분예빈시와 사련소(司臠所)를 합쳐 사축서라 이르고, 별좌(別坐) 3명과 별감(別監) 6명을 두었다. 1428년(세종 10)에 “닭, 돼지, 염소를 기르고 있다.”는 기록이 나오고(『세종실록』 10년 1월 6일), 1434년(세종 16)에는 분예빈시에서 기르던 돼지의 숫자를 따로 기르던 돼지 400마리에서 100을 감하고, 늘 기르던 새끼 돼지 580마리에서 180을 감하여 합계 700마리를 정액(定額)으로 일정하게 정하였고(『세종실록』 16년 5월 6일), 1438년(세종 20) 분예빈시에서 기르는 돼지로 중국 사신과 이웃나라의 객인을 공대한다고 하였다(『세종실록』 20년 7월 21일).

1460년(세조 6)에 분예빈시와 합하여 사축소로 바꾸었다(『세조실록』 6년 5월 22일). 1466년(세조 12) 사축서로 고쳐 독립하였고, 여러 가축을 기르는 일을 맡은 종6품아문으로 관원은 영(令) 1명, 승(丞) 2명, 사리(司吏) 2명을 두었다.

1637년(인조 15) 잠시 폐지되기도 하였으나 곧 복구되었다가, 1767년(영조 43) 호조(戶曹)에 합쳐졌고, 호조 낭청 1명이 그 일을 맡아보았으며, 뒤에 구사축서(舊司畜署)로 불렸다. 관원으로는 호조 판서가 겸임하는 제조(提調) 1명, 종6품의 사축(司畜) 1명, 종6품의 별제(別提) 2명이 있었다. 1865년(고종 2) 다시 종6품아문으로 정비되었으나,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속대전(續大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송수환, 『조선전기 왕실재정연구』, 집문당,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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