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병영(北兵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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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 경성에 설치한 병마절도사영.

개설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은 조선시대 각 도의 육군을 통솔하는 사령관인 종2품 병마절도사가 군진(軍陣)을 설치하여 주둔한 곳이다. 변경 지역인 함경도에는 함흥감영(監營)에 있는 관찰사가 병마절도사직을 겸하는 한편, 2명의 전임직(專任職) 병마절도사가 경성(鏡城)과 북청(北靑)에 주둔하였다. 전자를 북병영, 후자를 남병영이라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398년(태조 7) 함경북도의 행정 구역을 정할 때, 이 지역을 경성이라 지칭하고 만호진(萬戶鎭)을 두었다. 1400년(정종 2) 다시 군(郡)으로 변경하면서 이곳에 함경도병마절도사영을 설치하였다. 1467년(세조 13) 북청에 남병영이 설치되자 북도병마절도사영으로 개칭되어 관할 구역을 남병영과 나누어 담당하게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조선초기 6진 개척의 전진기지로서 함경북도는 지역 방어의 거점이었다. 함경북도병마절도사를 약칭하여 북병사(北兵使)라고 불렀는데, 함경북도수군절도사(咸鏡北道水軍節度使)를 당연직으로 겸하였다. 여진과 접경하여 군사적 긴장이 높은 곳이었으므로, 무예가 뛰어나고 신망이 두터운 무장이 북병사직에 선임되었다. 참모 격인 종3품 병마우후(兵馬虞候) 1명을 비롯하여 종9품의 외관직인 심약(審藥) 1명 등의 품관이 배속되었고, 각급의 군관(軍官)과 수백 명의 직속 병력이 배치되었다. 그 밖에 영리(營吏)를 비롯한 아전 무리와 공장(工匠), 노비 등도 소속되어 있었다.

북병영의 소속 지역은 경원진·회령진·종성진·온성진·경흥진·부령진·훈융진·동관진·고령진·유원진·미전진·조산포 등이었고 그 이남은 남병영에 속하였다. 이 밖에 행영(行營)이라고 하는 이동 사령부가 설치되어 북병사가 휘하 병력을 이끌고 나아가 순회하며 주둔하기도 하였다. 관할 구역을 지나는 봉화(烽火)의 관리도 주요한 임무였으며, 벚나무 껍질[樺皮], 녹용 등을 중앙에 공급하기도 하였다. 군비에 소모되는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막대한 관곡이 환곡(還穀) 등으로 운영되거나 병량(兵糧)으로 비축되었다.

변천

1400년 개설 당시부터 북병사가 경성군의 지방관직도 겸하였다. 처음에는 판군사(判郡事)라고 하였는데, 1436년(세종 18)에 경성군이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면서 판부사(判府事)로 개칭하였고, 후일 도호부사(都護府使)로 바뀌었다. 1455년(세조 즉위)에는 정6품의 병마평사(兵馬評事) 1명이 새로이 배속되었다. 병마평사는 병마절도사의 휘하에서 문부(文簿)의 관장, 군자(軍資)의 조달, 인사 고과(考課), 개시(開市)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문관직이었다. 변경의 막강한 군사적 권한을 가진 병마절도사를 견제하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1637년(인조 15)에 잠시 폐지되었다가, 1663년(현종 4)에 다시 설치되었다. 1884년(고종 21)에는 함경북도안무사겸병마수군절도사(咸鏡北道按撫使兼兵馬水軍節度使)를 임명하여 북도 10주(州)의 민정과 군정을 총괄하게 한 적도 있다(『고종실록』 21년 윤5월 5일). 1684년(숙종 10)에는 함경도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고 힘이 센 자 600명을 선발하여 친기위(親騎衛)라는 부대를 신설하였다. 초기에는 북병영에 속해 있는 10읍(邑)에서 300명을 선발하였는데, 이후 500명까지 늘어났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홍재전서(弘齋全書)』
  • 『만기요람(萬機要覽)』
  • 『대동지지(大東地志)』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