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민고소지법(部民告訴之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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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하급 서리나 일반 백성들이 서울과 지방의 상급 관리들을 고발할 수 있도록 한 법.

개설

부민고소법(部民告訴法)은 중앙 관서의 서리(書吏)·고직(庫直)·사령(使令) 등 하례(下隷)와 지방 관서의 아전(衙前)·장교(將校) 등이 상급자인 관원을 고소하거나 지방의 향직자(鄕職者)·아전·백성이 관찰사나 수령을 고소할 수 있도록 한 법이다. 그러나 법전이나 기타 사료 등에서 쓰인 용례를 살펴보면, 부민고소법은 실제로 부민고소 금지법으로 이해되고 있다. 성종 이후 부민고소는 금지되었고 부민고소의 경우는 엄벌에 처해졌으며 이러한 기본 원칙은 조선후기까지 지속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부민고소법을 제정한 목적은 수령 등 상급 관리의 횡포를 막기 위한 것이었으나 부민에게 고소를 허락함으로써 초래될 수 있는 상하 질서의 훼손 등에 대한 우려는 부민고소의 논의에서 항상 쟁점이 되었다. 수차례 그 치폐에 대한 논의가 반복되었으나 전체적인 윤곽은 부민고소는 원칙적으로 금지하되 개인감정으로 인해 수령을 모함하려는 의도가 아니고 부모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는 경우 등은 그 실정을 아뢰도록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갔다.

부민고소에 대한 형률은 『대명률(大明律)』 「형률(刑律)」 ‘매제사급본관장관(罵制使及本管長官)’조에 실려 있는데 부민이 목사(牧使)·지관(知官)·현령·감무(監務) 등 수령을 욕하고 꾸짖는 경우에는 장 100에 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경국대전』 「형전(刑典)」 소원조(訴寃條)에도 부민고소를 금지하는 조문이 실리게 되어, 종묘(宗廟)·사직(社稷)에 관계되는 모반대역죄와 불법살인죄를 고소하는 것은 허용하되 경사(京司)의 서리(書吏)·고지기[庫直]·서원(書員) 등인 이전(吏典)과 복례(僕隷)가 그 관원을 고소한 경우, 품관(品官)·이(吏)·민(民)이 그 관찰사·수령을 고소한 경우에는 수리하지 않으며, 고소자를 장(杖) 100·도(徒) 3년에 처하였고, 타인을 몰래 사주해 고소하게 한 자도 같으며, 무고한 자는 장 100·유(流) 3,000리 형으로 처벌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관원·관찰사·수령들의 비리·불법 행위·오판 등으로 인해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당사자는 서울은 주장관(主掌官), 지방은 관찰사에게 호소할 수 있도록 했다. 한편 『후속록(後續錄)』에 실린 수교(受敎)에서는 부민고소의 경우 전가사변(全家徙邊)에 처하도록 하였는데, 이후 전가사변 형벌의 과중함에 대해 논의가 분분하기도 했다.

『속대전(續大典)』에서는 고을 백성이 수령의 형장(刑杖)을 맞아 죽어서 격쟁(擊錚)하게 된 경우에는 먼저 관찰사에서 조사하도록 해서 죄가 수령에게 있으면 수령에게 죄를 주고 만약 무고면 부민고소율(部民告訴律)로 논죄하도록 했다. 그리고 고소장 안에 매우 원통하고 억울하다고 쓴 것 이외에 자신에게 관계되지 아니한 일을 아울러 기록한 자는 『경국대전』에 의거하여 처벌하도록 했다.

내용 및 변천

부민고소의 찬반에 대한 논의는 조선초기부터 계속되었다. 1433년(세종 15) 『속전(續典)』의 ‘부민고소조(部民告訴條)’에서 "자기의 억울한 일을 호소한 것은 소장(訴狀)을 수리하여 다시 판결한다."는 조문을 놓고 그 수리 여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상하의 구분은 엄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만약 부민(部民)의 고소를 들어서 수령을 죄준다면, 높고 낮은 것이 질서를 잃어서 풍속이 아름답지 못하게 될 것이므로 부민의 말을 청리(聽理)하지 말게 해야 한다는 의견이 개진되었다. 그러자 세종은 이를 전연 수리하지 않는다면 억울함을 당한 자가 이를 호소하여 풀 곳이 없게 될 것이라는 점을 들어 일단 소장은 수리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억울함을 풀게 하되 오판이 있었더라도 수령은 처벌하지 않도록 하라는 방향을 제시했다.

이후에도 이의 허용 여부를 둘러싸고 여러 의견들이 개진되었으나 대체로 부민고소를 금지해야 한다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졌다. 부민고소를 금지해야 한다는 입장의 주된 논거는 수령은 임금을 대신하여 정사를 맡는 자이므로 수령에게는 군신(君臣)의 예를 갖추어야 하는데 백성이 수령을 고소하는 것은 이러한 예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부민의 수령에 대한 관계는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것, 또 신하의 임금에 대한 것과 같아서 절대로 범할 수 없으며, 만약 그 허물과 악함을 고소하면 이는 신하와 아들이 임금과 아비의 허물을 들추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즉 명의(名義)를 범하고 예의를 심하게 무너뜨리며 나라를 예로써 통치한다는 기본 원리에 어긋난다는 점이 부민고소를 금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였다. 수령과 민, 아버지와 아들,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한결같이 충과 효의 관계로 파악하는 한 신하 된 자가 자신의 어버이와 같은 임금[君父]을 고소하는 부민고소는 충효의 강상을 거스르는 중대 범죄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처럼 백성이 수령을 고발하는 행위를 금하자 수령의 탐학과 불법이 거리낌 없이 자행되었다. 부민고소 금지법이 세워진 후부터 수령의 잘못과 악행을 서로 고발하거나 말하는 백성이 있으면 수령이 문득 이 법률을 적용하였다. 그래서 수령들은 두려워하고 꺼릴 것이 없어, 오로지 탐욕스럽고 잔학하며 부당하게 조세를 긁어 들이기만을 일삼으므로 백성들이 탄식한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적미(糴米) 등을 둘러싸고 수령, 감고(監考)·색리(色吏) 등이 백성에 끼치는 해독이 크고 백성들의 고통은 뼈에 깊이 사무치지만 감히 입을 열어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것은 부민고소의 법이 무겁기 때문이었다. 백성은 수령의 잘잘못을 따질 수 없었으며 자신에게 억울한 일이 있어도 시정할 수 없었다.

따라서 부민고소를 금지해야 한다는 목소리 못지않게 부민고소를 허락해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았다. 특히 『후속록』에서 부민고소에 대한 형벌인 도삼년(徒三年)이 가볍다 하여 전가사변(全家徙邊)으로 결정하였는데 이 법이 세워진 후에 수령은 이 법을 빙자하여 비록 살인을 고발한 일이라도 부민고소라고 이름을 붙여 그 옥사를 조작하고 백성들은 전가사변의 죄를 겁내어 자기에게 억울함이 있어도 차라리 죽을지언정 고발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수령이 더욱 방자하게 탐학하게 된 까닭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또 나라에서 백성들의 관장을 세우되 가렴주구(苛斂誅求)하는 자를 막아야 하는데 순리(循吏)는 드물고 혹리(酷吏)는 방자하다며 이는 부민고소법, 즉 부민고소를 금지하는 법이 엄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래서 애처로운 백성들이 학정(虐政)에 시달려도 원통함을 아뢸 데가 없으니 이 법만 혁파하면 탐오(貪汚)한 풍습이 자연히 없어지고 만백성이 기쁘게 복종할 것이라 하여 부민고소를 금지하는 법의 폐지를 적극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수령의 불법으로 인해 민이 피해를 입는 점을 중시하는 쪽에서는 부민고소를 허락하자 했고 부민고소로 인해 수령이 위축되는 점을 우려하는 쪽에서는 부민고소를 금하자고 해서 어느 한쪽을 일관되게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리고 수령을 고발한 경우 부민고소로 논할 것인지, 아니면 무고(誣告)로 논할 것인지도 문제였다. 문종 1년에 강화(江華)의 목자(牧子) 강석(姜石)이 그가 맡아 보는 목장의 말을 도둑질하였다고 강화부사였던 김경(金俓)과 양수(楊隋)를 고소하였다. 이에 대해 이를 부민고소라 하여 김경과 양수를 죄주면 부민들이 반드시 수령이 체임되기를 기다려 고소하는 일이 잇달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고 결국 강석을 무고로 논죄하였다. 즉 수령을 고소하는 것이 부민고소로 정당한 것인지, 아니면 무고로 봐야 하는 것인지도 판단 기준이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부민고소는 금법(禁法)으로 인식되었고 상하 질서를 강조하는 유교적 조선 사회에서 부민고소금지는 기본 방침이 되었다. 성종 20년, 부민고소의 문제점에 대해 신료들 간의 논의가 있었는데 대부분이 부민고소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대신 관찰사를 적임자로 뽑아 보내거나 순안어사(巡按御史)를 한 해에 두 차례 보내기도 하고 더러는 한 해씩 걸러 보내기도 하여 범법하는 자를 적발하여 준엄하게 다스리면 된다는 방안을 내놓았다.

또 관찰사가 수령의 불법을 규탄하고 사헌부는 풍문(風聞)을 들으면 탄핵하고 부민들에게 자기의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스스로 고소하게 하며, 또한 농사 틈이 되면 때 없이 대관(臺官)을 보내 규찰하게 한 것이 곧 조종(祖宗) 때의 고사이므로 강직(剛直)하고 올바른 조사(朝士)를 가리어 대관(臺官)의 직을 부여해서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 규찰한다면 좋을 것이라는 의견,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의 고사에 의거하여 강직하고 총명한 조사(朝士)를 가려 어사(御史)의 직을 부여하여 시골을 돌아다니며 민간의 병폐를 묻게 하여 수령들을 경계하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 감사는 3품 당상관(堂上官)을 보내지 말고 언제나 벼슬이 높고 명망이 두터운 사람을 가려서 보내어 수령들이 그들의 풍채(風采)만 바라보고도 두렵게 여기게 하자는 의견 등이 제시되었다. 대체로 부민고소를 금지하되 억울한 일이 있으면 스스로 하소연하도록 하고 감사나 어사를 파견하여 수령을 관리하자는 선에서 의견이 모아졌다.

이처럼 성종대 이후 조정에서는 기본적으로 부민고소를 금지하는 입장을 취하였고 이를 어긴 자는 엄벌에 처했다. 1528년(중종 23), 평안도 의주(義州)에 입거(入居)한 사람이 그 고을에서 죄를 짓고도 도리어 그 관원을 고소하러 서울에 왔다가 수리하지 않자 돌아간 일이 있었는데 이 자의 죄를 다스려 풍속이 징계되도록 해야 하고 고소하는 풍속을 없애야 한다며 부민고소에 대한 형률을 적용하기도 했다.

성종대에 부민고소를 금지하는 원칙이 세워지자 그 이후 수령 탐학의 문제가 계속 불거지게 되었으나 수령의 탐학을 제지하고 경계하는 측면에서 부민고소에 대한 처벌이 탄력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1666년(현종 7) 담양(潭陽)의 품관배(品官輩)들이 관이 빈틈을 타 대동고(大同庫)를 열고 대동목(大同木)을 꺼내 보았다는 이유로 대동감관(大同監官)과 그 당시 부사(府使)가 체직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때 관련된 품관 40여 명이 무거운 매질을 당하였고 이로 인해 죽은 한 품관의 아들이 수령의 남형(濫刑)을 들어 격쟁하였다. 이에 부민고소율이 적용되어 격쟁자가 전가사변(全家徙邊)되었으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게 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곧 석방되었다. 즉 조선후기에 가면 수령에 대해 고발이 있을 경우 이를 부민고소로 처리하느냐, 아니면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 하는 소원(訴寃)으로 처리하느냐에 따라 그 처벌이 달라졌다.

부민고소에 대한 처리의 기준, 처벌은 일관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부민고소에 대한 형률이 본래 사형까지는 아닌데도 고소인이 장을 맞아 거의 죽게 된 경우도 많이 발생하였고 관할 부민이 아니면 고소하지 못하게 되어있는 원칙도 잘 지켜지지 않았다. 수령이나 변장(邊將)을 고소하고 어사(御史)는 그러한 고소를 청리(聽理)하여 보고하기도 하는 등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이 부민고소율의 적용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군신의 도, 풍속 교화와 관계되는 부민고소는 허용하지 않으면서 수령의 남장(濫杖)이나 관에 호소한 사연이 효에 관련된 강상적인 내용의 경우 그때그때 고려하여 처리하는 원칙은 조선후기까지 일관되었다.

의의

조선시대에 있어서 원칙적으로는 부민고소 금지의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지 못하도록 하고 상하존비(上下尊卑)의 명분을 확고하게 하는 유교적 이념을 지키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소원(訴寃) 제도를 통해 스스로 상소를 올리도록 하는 길을 허락하여 백성에 대한 수령 등 상급 관리의 탐학을 경계하도록 함으로써 원래 부민고소가 가지고 있었던 기능을 대신하도록 하였다.

즉, 부민고소의 치폐 논란에는 위민(爲民) 정책과 상하(上下)간의 명분(名分) 질서의 유지라는 두 문제가 중첩이 되어 있었는데 원칙적으로는 부민고소를 금지함으로써 명분을 유지하였고, 수령의 불법에 대한 피해자가 스스로 고발하도록 함으로써 수령 탐학을 다스릴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심희기, 「한국적 전통과 시민적 덕성-部民告訴禁止法과 世宗의 苦惱-」, 『世宗時代 文化의 現代的 意味』,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8.
  • 조윤선, 「조선후기 綱常犯罪의 양상과 法的 대응책」, 『법사학연구』34, 2006.
  • 최이돈, 「조선초기 수령고소 관행의 형성과정」, 『한국사연구』82, 199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