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烽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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횃불과 연기를 이용해 국경과 해안의 안위(安危)를 약정된 신호로 전달하기 위해 설치한 군사 통신 시설.

개설

‘봉(烽)’은 횃불을, ‘수(燧)’는 연기를 뜻한다. 국경과 해안 지역에서 매일 또는 적변(賊變)이 일어났을 때, 횃불과 연기를 이용해 미리 약속된 신호로 그 상황을 본읍(本邑)·본영(本營)·본진(本鎭)·행영(行營)·수영(水營) 혹은 최종적으로 중앙의 병조에 전달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봉수는 삼국시대에 원시적으로 활용되다가 고려시대에 4거제로 성립되었다. 그 뒤 조선초기 세종대에 전국적인 5거제 봉수망이 확립되었다. 이후 봉수는 노선의 변동에 따라 치폐(置廢)와 이설(移設) 및 복설(復設)이 있었다. 오늘날 한반도 북부 지역에 670여 기, 남부 지역에 500여 기가 남아 있다.

봉수제(烽燧制)가 국가적으로 운영되던 조선시대에 각 봉수는 별다른 일이 없을 경우 매일 평안을 상징하는 1거의 거화(擧火)를 하였다. 봉수가 지나는 노선의 백성들은 이를 보고 변방의 안위를 판단하였으므로 봉수제는 군사 통신 제도의 기능뿐 아니라 백성들에 대한 경보(警報)의 기능도 수행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위정자들은 국가 경영의 근간인 봉수의 연결과 유지 및 관리에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894년(고종 31)에 갑오개혁을 계기로 봉수제가 중지되고, 이듬해에 각지의 봉대(烽臺)와 봉수군(烽燧軍)이 폐지됨으로써 봉수는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내용 및 특징

고려시대에는 1149년(의종 3), 서북면병마사 조진약(曹晉若)의 건의로 봉수제가 성립되었다. 이때 야화주연(夜火晝烟) 즉 밤에는 불을 피우고 낮에는 연기를 이용하는 일과 위급한 상황에 따라 1급(急)에서 4급까지 나눈 봉확식(烽□式)을 정하였다. 또 봉수마다 방정(防正) 2명과 백정(白丁) 20명씩을 두고 평전(平田) 1결(結)을 지급하여 생활 기반을 마련해 줌으로써, 봉수제를 공식적으로 정비하였다.

한편, 고려가 정식으로 수도 개경에 봉수 시설을 갖춘 것은 1351년(고려 충정왕 3)부터이다. 이때에 비로소 개경 송악산(松嶽山)에 봉확소(烽□所)를 설치하여 송악봉확(松嶽烽□)에 장교 2명, 부봉확(部烽□)에 장교 2명 및 군인 33명을 배치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조선 세종대에 확립된 5개 봉수로의 봉수망과는 다른,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집결하는 봉수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2세기 중엽에 성립된 고려의 봉수는 14세기 중엽부터 본격화된 왜구의 극심한 침입을 겪으면서 이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계속적인 설치와 보완이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는 1419년(세종 1) 5월에 병조의 요청에 의해 바다와 육지의 적변에 따라 거화의 수를 달리하도록 규정한 5거제의 봉수제를 확립하였다. 그 뒤 1433년(세종 15)부터는 북방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해 다수의 봉수를 설치하였다. 이 무렵 본격화된 압록강 상류의 4군(郡)과 두만강 하류 남안의 6진(鎭) 설치를 계기로 연변봉수(沿邊烽燧)의 성격을 띤 연대(煙臺)를 다수 설치하였다. 그에 따라 한반도 북부는 1423년(세종 5)에 목멱산봉수를 설치하여 중앙의 경봉수(京烽燧)로 최종 집결하도록 확립한 5개 노선의 봉수로 가운데 3개 노선이 시작되는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즉, 경흥 지역 서수라진의 우암(牛巖)은 제1봉수로, 강계 지역 만포진 여둔대(餘屯臺)는 제3봉수로, 의주 지역 고정주(古靜州)는 제4봉수로의 직봉(直烽)과 이에 딸린 간봉(間烽)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지리적 특성에 따라 봉수의 성격을 구분하면 오늘날의 자강도 및 평안북도에 속한 일부 봉수는 압록강 변에 인접한 연변봉수이며, 평안남도 및 황해북도에 속한 일부 봉수는 내지봉수(內地烽燧)에 해당한다. 노선에 따라 구분하면 제1봉수로는 두만강 하류 남안의 6진과, 제3봉수로는 압록강 상류의 4군과 관련이 있다. 또 제4봉수로는 서해의 서한만 및 경기만 연안에 설치된 해안 연변봉수를 지나 한성부의 무악서봉을 거쳐 최종적으로 목멱산 제4봉수에 연결되었다.

그에 비해 한반도 남부 지역의 경우, 부산 다대포진 응봉(鷹峰)은 제2봉수로, 여수 방답진 돌산도(突山島)는 제5봉수로의 직봉과 간봉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제2봉수로의 직봉과 이에 딸린 10개 노선의 간봉이 시작되거나 지나던 울진·영덕·포항·울산·부산·창원·진해·마산·거제·고성·통영·사천·남해 등 경상도 연안의 봉수는 봉수의 성격과 구조 및 형태 면에서 연변봉수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신호 전달 체계상 경상도에서 충청도를 거쳐 경기도로 향하는 과정에서 산지가 많은 내륙의 고지로 북상하면서 구조 및 형태가 점차 내지화(內地化)되었다.

제5봉수로의 직봉과 이에 딸린 간봉이 시작되거나 지나는 길목에 위치한 광양·여수·순천·고흥·장흥·강진·해남·완도·진도·목포·신안·무안·영광·부안 등 전라도 연안의 봉수와, 충청도와 경기도의 서해안에 인접한 봉수도 마찬가지로 연변봉수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들 지역의 봉수도 내륙을 거쳐 경봉수로 집결하면서 점차 내지화되었다.

한편 강화도는 임진왜란과 두 차례의 호란(胡亂)을 겪은 뒤인 17세기부터 해안을 따라 자체적으로 집중적인 방어 체계를 갖추었다. 이때 최종적으로 중앙으로 연결되는 봉수 노선과는 다르게, 요망(暸望)이라 불리기도 하는 권설봉수(權設烽燧)가 인천 및 강화의 주요 도서 해안에 축조되었다. 『조선왕조실록』과 1685년(숙종 11) 3월의 『비변사등록』에 따르면, 1684년(숙종 10)과 그 이듬해 무렵에 강도(江都)의 문호(門戶)인 장봉도(長峰島)와 주문도(注文島)에 진(鎭)을 설치하고, 강화부 사람을 파견해 요망을 관장하게 하였으며, 모곡(耗穀)을 덜어 요식(料食)을 주도록 조치하였다(『숙종실록』 10년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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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강화도 서도면에 속한 주문도는 1686년(숙종 12) 9월의 『비변사등록』에 따르면 서쪽 수로(水路)를 요망하는 임무를 맡게 됨에 따라 섬 안에 요망대가 설치되었다.

봉수의 종류

봉수는 그 성격에 따라 경봉수·내지봉수·연변봉수·권설봉수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경봉수는 봉수제가 운영된 고려와 조선시대에,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한 중앙 봉수이다. 고려시대에는 개경 송악산에 국사당과 성황당 등 2기의 봉수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목멱산에 5개소의 봉수가 있어, 경봉수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담당하였다.

내지봉수는 연변봉수와 경봉수를 연결하는 내륙의 봉수로서 복리봉화(腹裏烽火)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1447년(세종 29) 3월에 의정부에서 병조의 정장(呈狀)에 의거해 올린 건의를 통해 ‘연변연대조축지식(沿邊烟臺造築之式)’과 ‘복리봉화배설지제(腹裏烽火排設之制)’가 동시에 마련되어 시행됨으로써 구체적인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연변봉수는 말 그대로 연변인 국경 및 도서(島嶼) 해안의 만(灣)과 곶(串)에 설치된 봉수를 가리킨다. 연대(煙臺)라고도 불렸는데, 외적과 맞서는 제일선 변경에 위치한 만큼 이곳에서 근무하는 봉수군은 항상 무기를 지닌 채 번을 섰다.

권설봉수는 조선후기에 군사 요충지인 영(營)과 진 등에서 자체적으로 설치해 운용하였다. 그런 까닭에 중앙으로는 연결되지 않고 본읍(本邑)과 본진(本鎭)에만 응하였다. 주로 해안 연변 지역에 설치되었으므로 연변봉수와 같은 의미로 통용되는 경우도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평안도 선천부의 봉수조 및 『대동지지(大東地志)』의 각 도 봉수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변천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에 봉수제가 확립된 뒤에도 조정에서는 봉수제의 허와 실에 대한 논의를 비롯해 효율적인 운영을 위한 개선책 등이 계속해서 제시되었다. 그뿐 아니라 한편에서는 봉수제 폐지론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실제로 1504년(연산군 10) 8월에는 평안도와 황해도 및 함경도 방면의 봉수를 폐지하였고, 11월에는 영남과 호남에서 충청도를 거쳐 올라오는 하삼도(下三道)의 봉수도 폐지하였다. 연산군은 봉수가 다만 변방 일의 유무를 보고할 뿐이니, 모든 변방의 일을 제때 치보(馳報)하면 봉수가 없어도 되므로 모든 봉수를 폐지하라고 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11월 1일). 이때 남산에 있던 5개소의 경봉수도 일시 폐지되었다. 그러나 1506년에 반정을 통해 중종이 즉위한 뒤, 각 도의 관찰사에게 봉수제의 복구를 명함에 따라 봉수제는 다시 복구되었다(『중종실록』 1년 10월 24일).

이처럼 봉수는 일시 폐지와 복구를 거쳤음에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에서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에 따라 이를 보완하고 대체하기 위한 통신 수단으로 파발제(擺撥制)가 1597년(선조 30)에 도입되어 봉수제와 같이 운용되었다. 봉수제는 이후 고종대까지 지속적으로 운영되었으나,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을 계기로 철폐되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군부의 주청에 의해 각지의 봉대와 봉수군이 폐지됨에 따라 봉수 역시 그 기능을 멈추게 되었다.

참고문헌

  • 『사기(史記)』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 『고려사(高麗史)』
  • 『고려도경(高麗圖經)』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여지도서(輿地圖書)』평안도(平安道) 선천(宣川) 봉수(烽燧).
  • 『대동지지(大東地志)』봉수(烽燧).
  • 김주홍, 『京畿地域의 烽燧硏究』, 상명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 김주홍, 『조선시대 봉수연구』, 서경문화사, 2011.
  • 김주홍, 『朝鮮時代의 內地烽燧』, 충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 김주홍·현남주, 「高麗~朝鮮時代 江華島의 烽燧·暸望」, 『江華外城 地表調査報告書』, 한국문화재보호재단,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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