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보(幷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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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으로 번을 서다가 교체된 뒤에 쉬면서 군포를 내는 보인.

개설

경상도의 수군(水軍)정병(正兵)으로서 각 진(鎭)과 포(浦)에 첨방(添防)된 자는 바람이 잔잔한 6개월간은 부방(赴防)하여 입번(立番)하고, 바람이 거세게 부는 6개월간은 번을 면제해 주고 포를 거두는데, 이를 유군포(留軍布)라고 하였다(『현종개수실록』 5년 3월 9일). 이와 같이 번을 서는 동시에 납포를 병행하는 자들을 병보라고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수군은 산간 고을에서 차출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이 바다에서 훈련할 때에 배를 타면 멀미[水疾] 등 고통을 호소하므로 현지의 토착 병사를 고용하여 번을 세우곤 하였다. 1665년(현종 6)에는 충청감사가 수군 운영의 불합리성을 지적하면서 수영(水營)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포민(浦民)으로서 물에 익숙한 자를 모집하여 군대를 만든 다음 평상시에는 그들이 고기잡이하여 생업을 꾸려 나갈 수 있도록 두고, 봄· 가을로 훈련할 때에는 수군들로 하여금 그들이 오고갈 때와 머무를 때의 식량을 계산하여 지급하도록 건의하였다(『현종개수실록』 6년 8월 3일). 이 건의가 받아들여지면서 수군에게 병보가 발생하였다.

변천

1665년(현종 6)부터 수군은 병보를 지니게 되었다. 그런데 양역제를 개혁하기 위하여 설치된 양역 이정청(釐正廳)에서 수군 보인의 포목을 1필 감하자, 통영(統營) 및 수영(水營)의 각 진보(鎭堡)에 번을 서는 병사들에게 지급하던 포목 재원이 부족하게 되었다. 1708년(숙종 34)에는 이러한 문제점이 지적되어, 비변사에서 주관하는 군포를 통·수영에 환급해 주도록 하였다(『숙종실록』 34년 10월 9일).

그런데 1716년(숙종 42) 경기의 풍덕(豊德)에서 수군에게 병보가 없는데도 3필이나 거두고, 이미 베를 바쳤는데도 수조(水操) 훈련에 나가게 하여 이에 대한 부당함이 제기되었다(『숙종실록』 42년 6월 1일). 수영에서는 풍덕 등 고을 14곳은 수령(守令)사목(事目)을 준수하지 않아서 수군 병보를 전혀 정하여 주지 않아 수군 원군(元軍)만이 베 3필을 바치므로 억울해한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기내 수군(畿內水軍)의 신포(身布) 1필을 줄이는 대신에 그 포를 받은 자가 수조에 나가도록 조치하였다. 이로써 기내 수군의 병보가 다시 3필로 확충되었다.

그러나 이후 양역 이정청의 절목에 따라 병보의 3필 중 1필을 또다시 감축해 지급하는 상황이 발생하였고, 이에 대한 원망이 불거져 나왔다. 이로 인해 같은 해 10월 비변사의 건의에 따라 이정청 절목을 폐지하고(『숙종실록』 42년 10월 24일), 대포(代布) 3필을 수취하는 수군 병보제를 다시 회복하였다.

참고문헌

  • 『양역실총(良役實摠)』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