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원충군(邊遠充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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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형·유형에 처해진 자를 먼 변방 지역의 군역(軍役)에 충원하는 것.

내용

조선시대에 사용했던 『대명률(大明律)』의 「명례율(名例律)」에는 군관(軍官)·군인(軍人)이 죄를 범하여 도형(徒刑)·유형(流刑)에 해당하면, 장(杖) 100대를 때린 후 거리의 원근에 따라 해당되는 위(衛)에 보내어 충군(充軍)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변원충군(邊遠充軍)이라고 해서 먼 변방에 소속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상세한 개별 조문에 따르도록 하였다. 태조 연간에 편찬된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에는 조선의 영토 기준에 맞게 변원충군의 배소지(配所地)를 수정하였다. 가령, 서울[京城]에 있는 자는 경상도에 충군시키고, 황해도에 있는 자는 경상도에 소속시키는 등이다. 1430년(세종 12)의 논의에서는, 『대명률』에서 규정하는 변원충군의 본뜻은 거리에 제한을 두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집행하자면 유(流) 3,000리보다 먼 곳에 보내야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이에 해당하는 지역이 없으니 유 3,000리와 같이 보아서 유 3,000리로 정해둔 배소의 극변방어소(極邊防禦所)에 소속시키게 했다.

1461년(세조 7)에는 군영(軍營)의 남자 종이 고문(拷問)을 당하여 죽은 사안이 발생하여 담당 군관이 변원충군되었으며, 1469년(예종 1)에는 여종(婢)의 주인을 무고(誣告)한 여종의 남편이 변원충군되기도 했다. 성종 연간에는 당번 군역을 사사로이 대신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는데, 『대명률』의 규정보다 가중(加重) 처벌하여 양인(良人)은 변원충군시키고 노비는 유 3,000리에 해당하는 속전(贖錢)을 바치게 하였다. 1677년(숙종 3)에는 문과(文科) 시험장에서 부정을 행하는 자들을 징계하기 위해서, 차서(借書)나 대술(代述)한 것을 자복한 자는 변원충군시키고 사면(赦免) 대상에서도 제외시키도록 하였다. 이는 이후 『속대전』에도 수록되지만 『대전통편』에서는 다시 사면을 허용하는 것으로 개정된다.

그 외에도 군문(軍門)의 장령(將領)이 군병(軍兵)을 마음대로 동원하여 교외(郊外)에서 숙박한 경우 그를 변원충군하였고, 국경을 넘은 자를 적발(摘發)하지 못하여 절도사(節度使)가 잡게 한 경우에도 해당 지역의 수령(守令)과 변장(邊將)을 변원충군하였다. 왕자군(王子君)과 대신(大臣)에게 나쁜 욕을 한 경우 등도 같은 형을 적용하였다.

용례

司憲府啓曰 全循義等曾經典醫監職事 今定本監廳直令史 必不服役 請須邊遠充軍 且吳明義當初在逃 國家以贓重 募人捕之 今以赦輕論 則爲惡者 無所懲矣 請全家徙邊 儻以爲過 請竄其身 傳曰 予當議諸大臣 司諫院亦請循義等罪 令姜孟卿議于政府 僉曰 律文內 欽天監天文生習業已成 能全其事 犯流及徙者 各決杖一百 餘罪收贖 今循義等亦依此例 定本監賤役 使不失其業 明義贓雖重 然按六典 赦前官吏犯贓入己者 不復敍用 勿許追罪 今初政當一遵舊典 不可加罪 從之(『단종실록』 즉위년 5월 19일)

참고문헌

  •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명률강해(大明律講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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