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인반차(發靷班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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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에서 영구가 상여에 옮기는 것부터 장지에 도착할 때까지의 과정인 ‘발인’과 의식 절차의 해설문 또는 행사 절차를 시각적으로 그린 그림인 ‘반차’가 합쳐진 말.

개설

1392년(태조 1) 조선왕조를 건국한 주도세력 즉 신진사대부들은 500년간 지속된 고려왕조의 체제를 유교이념에 입각해 개혁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조선왕조의 사회 전반이 유교화되기 시작했다. 조선왕조의 유교화는 사회적인 측면과 문화적인 측면에서 두드러졌다. 그것은 지난 1000년간의 사회, 문화가 불교에 기초해 있었기에 유교이념에 입각한 사회, 문화의 재편성이 그만큼 커다란 변동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문화면에서 드러나는 조선왕조의 유교화는 국가 의례와 가정 의례 양쪽에서 나타났다. 이 두 의례는 조선왕조의 주도 세력인 왕실과 양반의 의례였다. 당연히 조선 사회의 유교화는 왕실과 양반에 의해 주도되었다. 조선왕조의 국가 의례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기준으로 하였고 가정 의례는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기준으로 하였다. 『국조오례의』와 『주자가례』에 규정된 의례는 근본적으로 유교이념에 기반했다는 점에서 서로 유사하였다.

조선왕조 건국의 주체 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은 기본적으로 성리학을 공부한 지식인들이었다. 기원으로 따지면 유교 의례는 중국에서 성립되었으므로 그것을 조선 사회에 적용하려면 연구와 변용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여말선초의 신진사대부들은 『예기(禮記)』, 『의례(儀禮)』, 『주례(周禮)』 등 이른바 삼례(三禮)를 비롯하여 명나라의 예제(禮制), 『주자가례』 등을 연구했다. 그 결과가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예전(禮典)」과 『국조오례의』의 성과로 나타나 국가 의례의 기준이 되었다. 여기서 나아가 조선후기에는 수많은 의례 전문가들이 등장하여 예학서를 저술하게 되었다. 예컨대 17세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인 김장생(金長生)의 『가례집람(家禮輯覽)』과 『가례집람도설(家禮輯覽圖說)』, 유계(兪棨)의 『가례원류(家禮源流)』 등이 그런 사례인데, 이들 예학서들은 가정 의례의 기준으로 이용되었다. 조선시대 국가와 사회가 유교화되면서 가장 극적으로 바뀐 부분이 상장례였다. 화장(火葬)과 49재 등으로 대표되던 불교식 상장례가 매장과 3년상의 유교식 상장례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조선전기의 국가 의례서인 『경국대전』의 「예전」과 『국조오례의』에는 세자와 세자빈의 상장례가 누락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 왕실 자녀의 상장례는 이전에 거행된 사례들을 참조하여 거행되곤 하였다. 영조는 효장세자(孝章世子), 효장세자빈, 의소세손(懿昭世孫), 사도세자(思悼世子) 등의 죽음을 계기로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을 편찬하여 이 같은 문제점들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연원 및 변천

‘발인반차’는 1752년(영조 28)에 간행된 『국조상례보편』의 한 항목 명칭으로 사용됨으로써 고유명사화되었다. 영조대에는 효장세자와 효장세자빈 및 사도세자의 상이 연이어 있었다. 이에 따라 이들의 상례를 어떻게 치러야 할지를 놓고 많은 논란이 벌어졌다. 특히 영조 초반인 1728년(영조 4)에 세상을 떠난 효장세자의 상례는 많은 논란 끝에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상장례를 참조하여 거행되었는데, 이때 행한 예는 이후 세자 및 세자빈의 상례 즉 소상(小喪)에서 기준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그런데 효장세자가 세상을 떠난 1728년으로부터 23년째인 1751년(영조 27) 11월 14일에 효장세자빈 조씨(趙氏)가 세상을 떠났고, 이어서 또 네 달 후인 1752년(영조 28) 3월 4일에는 의소세손이 세상을 떠났다. 효장세자빈 조씨와 의소세손의 죽음은 상례와 관련하여 수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영조는 대상(大喪)과 소상(小喪)에 관련된 전후 의궤를 가져다 검토하고 취할 부분과 보완할 점을 살핀 뒤 개정(改定)한 후 여러 신하에게 명령하여 책으로 만들게 하였는데, 이 결과 『국조상례보편』이 1752년(영조 28) 여름에 완성되었다.

영조는 「어제국조상례보편전서(御製國朝喪禮補編前序)」에서 “이제부터 나라의 대상과 소상은 본 『국조상례보편』에 의거하여 거행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왕실의 상례는 기왕의 『국조오례의』와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를 대신하여 새로 편찬한 『국조상례보편』을 기준으로 하게 되었다. 따라서 『국조상례보편』은 무엇보다도 조선 건국 이후 300년 가까이 왕실 상례의 기준으로 사용되던 『국조오례의』를 보완, 대체하였다는 면에서 크나큰 의미를 갖는다.

절차 및 내용

발인반차는 『국조상례보편』 권2와 권5의 한 항목으로 되어 있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권2의 발인반차인데 그림이 아닌 해설문으로 되어 있다.『국조상례보편』권2의 발인반차에 의하면 발인 행렬의 맨 앞에 당부(當部)의 도사(都事)가 서고, 다음에 한성부(漢城府) 판윤(判尹), 예조(禮曹) 판서(判書), 호조(戶曹) 판서가, 대사헌(大司憲), 의금부(義禁府) 당하관 2명이 선다. 그 다음에 좌상군사(左廂軍士)와 사대(射隊), 사금(司禁)이 서며 다음으로 홍문대기(紅門大旗)를 비롯한 의장 행렬이 선다.

의장 행렬 다음에는 방상씨거(方相氏車) 4개가 좌우로 나뉘어 서고, 그 다음으로 만사(挽詞), 죽산마(竹散馬), 죽안마(竹鞍馬), 청수안마(靑繡鞍馬), 자수안마(紫繡鞍馬), 명기요여(明器腰轝), 견여(肩轝), 우보(羽葆), 향정(香亭), 명정(銘旌), 탁(鐸), 삽(翣), 대여(大轝) 등이 차례로 선다. 마지막으로 수행원들이 서는데 호군(護軍), 내시부(內侍府)·상의원(尙衣院)·내의원(內醫院)의 관원, 대군(大君) 이하, 병조(兵曹)·도총부(都摠府)의 당상관과 당하관, 승지(承旨), 주서(主書), 사관(史官), 예조·병조의 정랑, 종친, 모든 문관·무관, 감찰(監察), 의금부 당하관, 사대, 우상군사(右廂軍士)의 순서로 서서 산릉을 향해 간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조선후기 들어 유교식 상장례는 왕실에서뿐 아니라 양반, 농민 등 전 사회계층에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발인 등의 유교식 상장례는 전통시대의 상장례를 대표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 송지원, 「국왕 영조의 국장절차와 『國朝喪禮補編』」, 『조선시대사학보』51, 2009.
  • 이현진, 「國朝喪禮補編의 편찬과 의의」, 『규장각소장 왕실자료 해제 해설집』2,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