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중(朴熙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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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64년(고려 공민왕 13)~1446년(조선세종 28) = 83세]. 조선 초기 태종(太宗)~세종(世宗) 때의 문신. 예문관(藝文館)직제학(直提學)과 남원부사(南原府使) 등을 지냈다. 초명은 박희종(朴熙宗)이다. 자는 자인(子仁)이고, 호는 위남(葦南)이다. 본관은 진원(珍原)이며, 거주지는 서원(瑞原)이다. 아버지는 현감(縣監)박온(朴溫)이고, 어머니 진원 전씨(珍原田氏)는 전의(田薿)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박홍서(朴洪瑞)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박첨(朴瞻)이다.

태종~세종 시대 활동

박희중(朴熙中)은 생원(生員)으로서 1401년(태종 1) 증광시(增廣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방목(榜目)』] 1406년(태종 6)에는 군자감(軍資監) 승(丞)으로서 전라도경차관(全羅道敬差官)이 되었다.[『태종실록(太宗實錄)』태종 6년 4월 11일, 태종 6년 6월 7일] 이어 세자부(世子府) 좌정자(左正字)가 되었다가, 1409년(태종 9) 이조 정랑(正郞)이 되었다. 1410년(태종 10) 7월 점마별감(點馬別監)에 차정되어 최진성(崔進誠)과 함께 헌마(獻馬) 업무를 담당하였다. 이 때 그가 의주(義州)에 이르러 역환(易換) 마필(馬匹)을 일일이 확인하고 보냈는데, 의주 등지의 군민(軍民)의 요구에 따라 임의로 진헌할 좋은 말과 군민의 나쁜 말을 바꾸어 보냈다. 그는 이 일로 순천부(順天府)에 유배되고 직첩을 박탈당하였다.[『태종실록』태종 10년 7월 12일] 1414년(태종 14) 하윤(河崙)이 그 땅을 점유하고자 통진 고양포의 제방 수축을 발의한 일에 직예문관(直藝文館)으로서 참여하였으나 이 사실이 드러나면서 파직되었다가 곧 복관되었다.[『태종실록』태종 14년 5월 18일, 태종 14년 5월 25일] 1451년(태종 15) 전라도경차관(全羅道敬差官)으로서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박습(朴習) 등과 김제(金堤)의 벽골제(碧骨堤)를 수축하였다. 그 뒤 동궁서연관(東宮書筵官)이 되었고, 1416년(태종 16) 4월에는 직예문관(直藝文館)으로 있었는데 지제교(知製敎)춘추관(春秋館)기주관(記注官)이 더해졌다.[『태종실록』태종 16년 4월 17일]

1421년(세종 3)에는 영암군수(靈巖郡守)를 지냈으면, 1422년(세종 4) 12월에는 일본국 회례사(回禮使)로 부사(副使)이예(李藝) 등과 함께 갔다가, 이듬해인 1423년(세종 5) 12월에 돌아왔다.[『세종실록(世宗實錄)』세종 3년 10월 19일, 세종 4년 12월 20일, 세종 5년 12월 4일] 이 때 그는 예문관 직제학이 되었는데, 그 이듬해인 1424년(세종 6) 3월 직제학의 관직을 파면 당하였다.[『세종실록』세종 6년 3월 27일] 그 후 남원부사(南原府使)가 되었으나, 1426년(세종 8) 4월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세종실록』세종 8년 1월 23일, 세종 8년 4월 19일]

1446년(세종 28)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 때 나이가 83세였다. 그는 『해동필원(海東筆苑)』에 이름이 오른 명필로 하윤의 아버지인 하윤린(河允潾)의 신도비 명문(銘文)이 그의 글씨이다.

후손

부인은 영광 오씨(靈光吳氏)인데, 자녀는 1녀를 두었다. 딸은 이종생(李從生)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춘정집(春亭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