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효성(朴孝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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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8년(선조 원년)~1617년(광해군 9) = 50세]. 조선 중기 선조~ 광해군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선산부사(善山府使)이다. 자는 백원(百源)이고, 호는 진천(眞川)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인데, 아버지는 여절교위(勵節校尉)박정(朴淨)이고, 어머니 인천채씨(仁川蔡氏)는 생원(生員)채응상(蔡應祥)의 딸이다.

선조 · 광해군 시대 활동

1590년(선조 23)에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고, 1594년(선조 27) 별시(別試)문과(文科)의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 박사(博士)로 전직되었다. 1596년(선조 29)에 당시의 폐단에 대하여 통렬한 어조로 상소를 올려, 상촌(象村) 신흠(申欽)에게서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제일가는 봉사(封事)라는 칭찬을 받았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명(明)나라 장수 유격(游擊)마정문(馬呈文)의 접반관(接伴官)으로 영남(嶺南)에 다녀왔다. 1598년(선조 31)에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한준겸(韓浚謙)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가 전적(典籍), 공조 좌랑(佐郞), 병조 좌랑, 예조 좌랑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599년(선조 32)에 강령(康翎)으로 부임하였을 때에는 민폐를 조정에 보고하여 백성의 세금을 낮추어 주었다. 1600년(선조 33) 8월에 다시 병조 좌랑을 거쳐 이듬해에 병조 정랑(正郞)이 되었다. 그러나 1596년(선조 29)에 올린 상소 내용이 말썽이 되어 외직으로 나가게 되어 1601년 11월에 연서찰방(延曙察訪)으로 나갔다가 어버이 상(喪)을 당하였다. 1604년(선조 37) 4월에 개성부경력(開城府經歷)이 되고, 1607년(선조 40)에 대동찰방(大同察訪)이 되었다. 1609년(광해군 1)에 선산부사(善山府使)가 되었는데, 선정을 베풀었다. 1612년(광해군 4) 4월에 단천군수(端川郡守)가 되었는데, 역시 선정을 베풀어 포상을 받고,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다. 1617년(광해군 9) 7월 20일에 우사(寓舍)에서 향년 50세로 세상을 떠났다. 문장이 기이하고 굳건하였는데, 특히 사부(詞賦)에 능하였다. 평소 김상헌(金尙憲)과 조정호(趙廷虎) 등과 친교가 있었다.

성품과 일화

박효성은 천성이 엄숙하고 깨끗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그가 말하기를, “사람이 나에게 대하는 것은 나의 몸가짐에 달려 있으니, 내가 무엇 때문에 구차하게 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는가 하면, 평생 동안 권세가 있는 사람의 문전을 밟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선조(先祖) 중 청렴하다고 일컬어지는 좌랑박지(朴持)의 묘소가 고령(高靈)에 있었다. 그가 선산부사로 있을 때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는데, 그 제문(祭文)에 “남기신 청렴결백을 대대로 집안에 전하였습니다. 맹세코 실추하지 않아 선조를 더럽히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서 그의 지조를 볼 수 있다. 그는 효성을 천성으로 타고났는데, 녹봉을 받아 어머니를 봉양하지 못한 것을 통한으로 여겨 주식(酒食)을 먹을 때마다 반드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황해도 장단현(長湍縣) 지곡(智谷)에 있다. 정두경(鄭斗卿)이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손자인 이조 판서(判書)박장원(朴長遠)으로 인하여 이조 참판(參判)에 증직되었다.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군수(郡守)이곡(李轂)의 딸인데, 2남 3녀의 자녀를 두었다. 1자는 박훤(朴烜)이고, 2자는 병조 참의박정(朴烶)이다. 박정의 아들이 박장원이다. 1녀는 순흥군(順興君)김경징(金慶徵)의 처가 되었고, 2녀는 감사(監司)신익량(申翊亮)의 처가 되었으며, 3녀는 지평(持平)홍수(洪鐩)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청음집(淸陰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