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장원(朴長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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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12년(광해군 4)~1671년(현종 12) = 60세]. 조선 중기 인조·효종·현종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이조 판서(判書)이고, 증직(贈職)영의정(領議政)이다. 자는 중구(仲久)이고, 호는 구당(久堂)·습천(隰川)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인데, 아버지는 박훤(朴烜)이고, 어머니 청송심씨(靑松沈氏)는 충렬공(忠烈公)심현(沈誢)의 딸이다. 신응구(申應榘)와 김치(金緻)의 문인이다.

인조 시대 활동

1627년(인조 5)에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다. 1636년(인조 14) 겨울에 별시(別試)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으나,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서 외할아버지인 심현(沈誢)을 따라 강화도에 피란하였다. 1638년(인조 16)에 사관(史官)의 추천에 들어갔으나, 그는 나라의 화를 참담하게 여긴 나머지 벼슬길에 나갈 뜻이 없었으므로, 오래 지난 후에야 억지로 취임하였다. 1639년(인조 17)에 겸열(檢閱)이 되었다가 봉교(奉敎)가 되었다. 1640년(인조 18)에 전적(典籍)·감찰(監察)을 거쳐 이 해 7월에 정언(正言)이 되었다. 10월에 치러진 월과(月課)에서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먹이는 반포오(反哺烏: 까마귀)에 대해 시(詩)를 지어 올렸는데, 인조가 그 시를 보고 말하기를, “한 집안의 충효(忠孝)가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하게 하는 구나, 해조(該曹)로 하여금 쌀과 면포를 넉넉히 지급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1641년(인조 19)에 다시 정언이 되었다. 이 때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642년(인조 20)에 지평(持平)이 되고, 이 해 10월에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이 되었다.

1643년(인조 21)에 안음현감(安陰縣監)이 되어 나갔다가 1644년(인조 22)에 다시 수찬이 되었다. 1645년(인조 23) 3월 지제교(知製敎)가 되었고, 4월에 다시 정언이 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헌납(獻納)이 되었으며, 12월에 이조 좌랑(佐郞)이 되었다. 그 뒤 배천군수(白川郡守)로 나갔다가 1647년(인조 25)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1649년(인조 27) 1월에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효종 시대 활동

1649년(효종 즉위) 6월에 다시 승지가 되었다. 이 해 12월에 춘천부사(春川府使)로 나가서 마음을 쏟아 백성을 어루만지며 백성들의 효심(孝心)을 고취시키고 학문 등에 마음을 쓰니, 길에서 칭송의 노래가 들리었다고 한다. 1652년(효종 3)에 승지가 되었으나 1653년(효종 4) 9월에 삼수(三水)로 귀양 갔다. 1654년(효종 5) 11월에 방면하라는 명이 있어서, 다음 해인 1655년(효종 6) 7월에 석방되어 향리로 돌아갔다.

1658년(효종 9)에 상주목사(尙州牧使)에 임명되었는데, 정사를 정밀하고 사리를 곡진히 하니, 백성이 편안하였다고 한다. 1659년(효종 10) 4월에 강원도 감사(江原道監司)가 되었는데, 영동(嶺東) 지방에 큰 흉년이 들자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하여 구휼을 잘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돌을 깎아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고 한다.

현종 시대 활동

현종 즉위 후 강원도 감사로 있다가 1660년(현종 1) 6월 말, 조정으로 돌아와 대사간(大司諫)이 되고, 이 해 8월에 형조 참판(參判)이 되었다. 1661년(현종 2) 6월 13일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가, 이 달 21일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는데, 굳이 사양한 끝에 체직되었다. 이 해 윤7월에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가 다시 대사헌이 되었고 1662년(현종 3) 5월 또 다시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며, 이 해 6월에 예조 참판(參判)이 되었다. 그 뒤 이조 참판이 되었다. 1663년(현종 4) 2월 말 청(淸)나라 사신이 왔을 때 이조 참판으로 자급(資級)을 올려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다. 이 해 4월에 대사헌이 되었고, 6월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가 그 뒤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다.

1664년(현종 5) 2월 말경에 대사헌이 되었고, 이 해 4월 중순에 이조 판서(判書)가 되었으며, 이 해 7월에 예문관(藝文館)제학(提學)이 되었다. 그 뒤 다시 이조 판서가 되었다가, 이 해 12월 초에 형조 판서(判書)가 되었으며, 12월 하순에 대사헌이 되었다.

1665년(현종 6) 1월 초순에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가 곧 대사헌이 되었고, 이 해 4월에 다시 우참찬이 되었다. 이 해 7월에 대사헌이 되고, 이 해 8월에 경연(經筵)동지사(同知事)가 되었으며, 9월에 우참찬이 되었다가 10월에 대사헌이 되었다. 이 달에 원접사가 되었다. 11월에 판윤 되었다가 대사헌이 되었다. 1666년(현종 7) 1월 초순에 예조 판서가 되었다가 대사헌이 되었고, 곧 다시 예조 판서가 되었다. 이 해 9월에 이조 판서가 되었는데, 11월에 좌부빈객(左副賓客)을 겸임하였다. 1667년(현종 8) 1월 1일 형조 판서가 되었다가 이 달 15일 예조 판서가 되었고, 27일에는 대사헌이 되었다. 이 해 8월에 형조 판서가 되고, 9월에 대사헌이 되었으며, 11월에 좌참찬(左參贊)이 되었다. 1668년(현종 9) 1월에 이조 판서가 되고, 7월에 좌참찬이 되었다. 8월에 대사헌이 되었는데, 며칠 후 우참찬이 되었다가 하루 만에 홍문관(弘文館)제학(提學)이 되었다. 이 해 10월 중순에 대사헌이 되었다가 4일 만에 다시 우참찬이 되었고, 11월에 이조 판서가 되었다. 1669년(현종 10) 2월에 우참찬이 되고, 3월 초에 춘추관(春秋館)지사(知事)에 임명되었는데, 실록에서 정릉(貞陵)에 대한 사적을 상고할 일이 있어 강화부(江華府)에 다녀왔다. 이 달에 대사헌이 되고, 6월에 다시 또 이조 판서가 되자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는 사직소를 다섯 번이나 올려 임금의 허락을 받았다. 이 해 7월에 예조 판서가 되고 이어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위패(位牌)를 종묘(宗廟)에 모시는 일을 맡았다. 그는 이 일을 하면서 널리 상고하고 물어서 중대한 예를 완벽하게 끝마쳤다. 이런 중대한 의례를 감독한 공로로 1670년(현종 11) 윤2월에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다. 이 해 3월 말경에 순릉(純陵)의 봉분을 다시 만들기 위하여 함흥(咸興)에 다녀왔다. 이 해 5월에 우빈객(右賓客)이 되었다가 6월에 대사헌이 되었으며, 8월에 우참찬이 되었다.

1671년(현종 12)에 다시 한성부 판윤, 대사헌, 공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이 해 6월에 개성부유수가 되었는데, 그는 집이 가난하였고, 80세가 된 늙은 어머니가 계셨으므로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을 청한 것이다. 그가 7월에 부임하여 4개월도 채 안된 이 해 10월 18일 개성의 관사(館舍)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0세이다. 저서로는 『구당집(久堂集)』이 있다.

성품과 일화

박장원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며 순수하고, 조용하며 묵중하고, 겸손하며 관대한데다가 사려가 깊었다. 또 용모가 화평하여 일견(一見)에 선량한 군자(君子)임을 알 수 있었다. 천성이 효도에 독실하여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미처 봉양하지 못한 것을 매우 통한한 나머지 효성을 다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자신의 몸을 감히 자신의 몸으로 여기지 않아 몸가짐에 있어 감히 더럽히지 않고 사물을 접할 때 감히 태만하지 않는 등 어느 것 하나도 지극한 공경과 깊은 사랑에서 발로되지 않은 바가 없었으므로 그의 성실이 가정에 퍼지고 나라에 펼쳐졌다.

그가 개성부유수에 부임한 후 시사(時事)의 어려움에 대한 생각이 간절하여 밤중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세상을 떠나기 수일 전에 관사에서 아들에게 집필(執筆)을 명하고 구두로 상소의 초안을 불러 주었다. 큰 아들 박빈(朴鑌)이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그 상소를 올리니, 현종이 그가 세상을 떠날 때 남긴 상소를 보고 하교(下敎)하기를, “죽음에 임해서도 국사에 대해 건의하였으니, 걱정하고 사랑하는 정성이 여느 때보다 배나 더 하였으므로 매우 슬퍼하고 애도하도다.” 하고, 이어 그의 노모(老母)를 세상을 떠날 때까지 녹봉을 주어 봉양하도록 명하였다 한다.

묘소와 추증

1706년(숙종 32) 9월에 문효(文孝)라는 시호를 내리었다. 묘소는 황해도 장단(長湍) 선영 아래에 있는데, 윤증(尹拯)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다. 그가 효행으로써 널리 칭송받았기 때문에 1683년(숙종 9) 9월에 정려(旌閭)하였다. 1709년(숙종 35) 7월에 영의정을 증직(贈職)하였다. 부인 해평윤씨(海平尹氏)는 감찰(監察)윤원지(尹元之)의 딸인데, 4남 4녀의 자녀를 두었다. 1자는 안산군수(安山郡守)박빈(朴鑌)이고, 2자는 여산군수(礪山郡守)박선(朴銑)이며, 3자는 영천군수(榮川郡守)박심(朴鐔)이고, 4자는 생원 박진(朴鎭)이다. 1녀는 구봉징(具鳳徵)의 처가 되었고, 2녀는 지평(持平)이민채(李敏采)의 처가 되었으며, 3녀는 목사(牧使)이세귀(李世龜)의 처가 되었고, 4녀는 승지(承旨)이진수(李震壽)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사계집(沙溪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약천집(藥泉集)』
  • 『명재유고(明齋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