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종(朴漢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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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3년(명종 18) = ?]. 조선 중기 중종(中宗)~명종(明宗) 때의 환관. 봉작(封爵)은 밀성군(密城君)이다. 양아들은 내관(內官)박세겸(朴世謙)이다.

중종~명종 시대 활동

박한종(朴漢宗)은 1538년(중종 33) 내시부(內侍府)승전색(承傳色)으로 있었다.[『중종실록(中宗實錄)』중종 33년 10월 1일]

1545년(인종 1) <을사사화(乙巳士禍)>가 발생하였을 때, 내시부 도설리(都薛里)로서 문정왕후(文定王后) 편에 가담하여 궁중의 기밀을 탐지하여 알려주었다.[『명종실록(明宗實錄)』명종 즉위년 9월 19일, 명종 11년 1월 24일] 이 공을 인정받아 1545년(명종 즉위년) 9월 추성협익정난위사공신(推誠協翼定難衛社功臣) 3등에 책록되었고, 1546년(명종 1)에 내수사(內需司)제조(提調)가 되었다.[『명종실록』명종 즉위년 8월 29일, 명종 즉위년 9월 15일, 명종 1년 11월 30일] 이어 1547년(명종 2) 윤9월에는 가의대부(嘉義大夫) 밀성군에 봉해졌다.[『명종실록』명종 2년 윤9월 16일]

그 뒤 그는 내간수리총감역관(內間修理摠監役官)으로 경복궁(景福宮)강녕전(康寧殿)을 수리하다가 실화(失火)로 타버리자 사간원(司諫院)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아 1553년(명종 8) 9월 파직되었다가 1554년(명종 9) 2월 삭탈관직 되었다.[『명종실록』명종 8년 9월 15일, 명종 8년 9월 18일, 명종 9년 2월 29일] 1555년(명종 10) 12월 다시 밀성군에 봉해졌으며, 이후 승언색(承言色)이 되어 정헌대부(政憲大夫)에 제수되었다.[『명종실록』명종 10년 12월 3일, 명종 10년 12월 21일, 명종 15년 8월 30일] 그리고 1560년(명종 15) 10월 명종이 공신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고, 이때 박한종은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명종실록』명종 15년 10월 10일] 그러자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이 가자가 옳지 못하다며 거둘 것을 요청하였으나, 명종은 윤허하지 않았다.[『명종실록』명종 15년 10월 11일, 명종 15년 10월 12일] 그는 환관으로서 중종 · 인종(仁宗) · 명종 등의 3대에 걸친 임금을 섬기다가 1563년(명종 18)에 세상을 떠났다.[『명종실록』명종 18년 8월 12일]

성품과 일화

박한종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멋대로 행동하고, 성품이 음흉하고 교만방자 하였으며, 항상 화심(禍心)을 품었고 모의를 잘하였다.[『명종실록』명종 8년 9월 15일, 명종 18년 8월 12일]

한편 을사사화 당시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尹任)의 자손이 적몰(籍沒)되어 박한종의 종이 되었다. 박한종이 그의 양자를 혼인시키던 날 저녁에 윤임의 자손으로 하여금 말 앞에서 인도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인종의 왕후인 인성왕후(仁聖王后)가 그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여 병이 들었으므로, 이를 듣는 사람들이 마음 아프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명종실록』명종 10년 12월 3일]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지퇴당집(知退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