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필간(朴弼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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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83년(숙종 9)~ 1760년(영조 36) = 78세]. 조선 후기 영조(英祖) 때의 문신. 승정원(承政院) 승지(承旨)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 등을 지냈다. 자는 계직(季直)이고, 호는 정헌(靜軒)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예조 판서(判書)박태항(朴泰恒)이며, 어머니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유빈(柳彬)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박세해(朴世楷)이고, 증조할아버지는 박호(朴濠)이다. 부인 연안 이씨(延安李氏)는 이성조(李成朝)의 딸이다.

영조 시대 활동

1735년(영조 11) 증광(增廣)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방목(榜目)』] 그 해 7월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이 때 과시(科試)의 부정을 막기 위한 시관(試官) 선정 방법과 그 운영 시기를 건의하여 시행하게 했다.[『영조실록(英祖實錄)』영조 11년 7월 4일] 시관이 과장(科場)에 들어가야 하는 날 각사(各司)에 있는 관리 명부에서 시관을 일차로 뽑은 다음 그날 필요한 시관의 정수를 선정, 과거 시험장에 들여보낸다는 과장 규칙을 건의하여 이를 시행하게 하였던 것이다.

1737년(영조 13) 1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고, 이어 3월에는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영조실록』영조 13년 1월 26일, 영조 13년 3월 29일] 1740년(영조 16)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필선(弼善)이 되었고, 그해 10월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영조실록』영조 16년 10월 16일, 영조 16년 10월 20일] 1741년(영조 17) 1월에는 사헌부 장령이 되었으며, 그 해 6월 다시 세자시강원 필선이 되었다가, 1744년(영조 20) 2월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영조실록』영조 17년 1월 9일, 영조 17년 6월 22일] 이후 사간원 헌납(獻納)과 사헌부 장령을 번갈아 하다가, 1748년(영조 24) 1월 사간원 사간을 거쳐, 승정원 승지가 되었다..[『영조실록』영조 22년 2월 25일, 영조 22년 6월 19일] 뒤에 특진관(特進官)까지 이른 그는 1759년(영조 35) 9월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할 때 본인이 지은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올리기도 하였다.[『영조실록』영조 35년 9월 20일] 이듬해인 1670년(영조 36)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