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정당(熙政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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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에는 야대청, 중·후기부터는 편전의 역할을 하였던 창덕궁의 건물.

개설

희정당은 조선초 왕이 밤에도 신하와 대면하는 야대청으로 쓰였다. 그러나 중·후기부터는 선정전(宣政殿)이 주로 빈전으로 쓰이면서 희정당은 편전의 역할을 하였다. 순조는 “군주가 밝고 강하면 정사가 잘 다스려지고 덕이 닦이리니, 정사가 잘 다스려지고 덕이 닦이면 당명(堂命)을 생각하리라.” 하는 뜻을 담고 있다고 희정당을 풀이했다. 대제학(大提學)채유후(蔡裕後)는 희정당 상량문에 ‘희(熙)’는 ‘밝고 넓다’는 의미를 본 딴 것이라 하면서, “정사를 밝혀 백성을 접하니 백성이 충정을 다하고, 정사를 넓혀 백성을 구제하니 백성이 혜택을 입지 않은 이가 없다는 뜻으로 ‘희정(熙政)’이라 이름 하였다.”라고 썼다. 정사를 밝히는 집이란 결국 편전을 의미한다.

위치 및 용도

창덕궁의 공간 구성은 궁궐 제도의 규범이라 불리는 『주례(周禮)』「고공기(考工記)」의 공간 구성과 다르다.「고공기」에 따르면, 궁의 공간 구성 기본 원칙은, 궁궐은 하나의 축을 따라 각각의 문과 전각이 남북 방향으로 일정하게 배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창덕궁의 경우 돈화문(敦化門)을 통과하여 오른쪽으로 한 번 길을 꺾고 금천교(禁川橋)를 건넌 후, 진선문(進善門)을 지나 다시 한 번 왼쪽으로 꺾어 들어 인정문(仁政門)을 통과하면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에 다다른다. 인정전의 동쪽에 편전인 선정전이 있고, 편전이나 침전으로 용도를 딱히 가를 수 없는 희정당이 선정전의 북쪽이 아닌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희정당 북쪽, 같은 축선 상에 중전의 침전인 대조전(大造殿)이 배치되어 있다. 응봉 아래의 좁은 공간, 그 지세가 평탄하지 않았던 터 위에 창덕궁의 건물들은 동북 방향을 따라 우선 횡(橫)으로 다시 종(縱) 방향으로 주요 건물이 놓여 있다. 배치가 자유로운 편이다.

「동궐도(東闕圖)」에서 본 희정당은 서쪽 벽에 바로 잇대어 남북으로 긴 담장을 쌓아 선례문(僎禮門)을 내었고 희정당 외행각과 공간을 일단 분리시켜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뒤쪽 담장에는 장순문(莊順門)을 내었고 단차가 있는 담장을 연이어 쌓았다. 동쪽으로는 여러 켜로 석단을 쌓아 지형의 높고 낮은 차이를 해결하고 있다. 희정당은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의 남쪽에 연해 있고 회랑으로 연속된 건물이었기 때문에 대조전에 재난이 있을 때마다 재난을 함께 겪었다.

원래 희정당은 왕의 침소이며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강론을 펼치거나 때로 정무를 보기도 하던 곳이었다. 그런데 희정당은 용도에 관한 정체성이 좀 모호하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는 “연침접군신지소”라고 하여 희정당을 침전(寢殿)의 하나로 보았고 내전에 속하는 건물이라 기록하였다. 그러나 순조대에 간행된 『궁궐지(宮闕誌)』에서는 희정당을 ‘희정당재 대조전남 즉편전시사지소야(熙政堂在大造殿南卽便殿視事之所也)’라고 적어 대조전 남쪽에 있는 궁의 편전(便殿)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약용(丁若鏞)은 늦은 밤 11시에서 새벽 1시쯤[三更] 유생 차림의 왕과 희정당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거나 근신들이 모여 연회를 즐겼다는 내용을 시로 기록해 놓고 있다. 이처럼 희정당은 역사의 기록 속에서 어느 전각보다도 활발한 용도로 쓰였다.

변천 및 현황

희정당은 창덕궁 창건 시 영건되어 ‘수문당(修文堂)’, ‘숭문당(崇文堂)’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1496년(연산군 2) 12월, 가벼운 화재 이후 보수하면서 희정당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처음 당호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침전 가까이에 있는, 왕이 학문을 닦던 장소였다. 성종대에는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대왕대비의 섭정 공간으로 쓰기도 하였다. 이러했던 전각을 희정당이라 개칭할 때는 신하들의 만만치 않은 반대가 있었다. ‘인정전(仁政殿)’, ‘선정전(宣政殿)’의 전각명은 정치를 하는 공간이라는 의미의 ‘정(政)’을 썼지만 이 전각은 그럴 수 없다며 전각의 용도를 분명히 했던 것이다. 결국 숭문당에서 희정당으로 당호가 정해지면서 편전의 기능이 짙어졌던 것 같다(『연산군일기』 2년 12월 8일). 이후, 임진왜란으로 인한 창덕궁 소실, 인조반정으로 인한 창덕궁 대부분 전각의 소실로 희정당도 함께 재난을 당했고 1647년(인조 25)의 창덕궁 재건 시에 함께 재건되었다(『인조실록』 25년 11월 12일). 순조 때, 내전 일곽의 화재로 다시 소실된 것을 1835년(헌종 1)에 재건하였다.

17~19세기, 희정당의 형태는 궁궐의 주요 전각처럼 높고 넓은 기단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지면과 다름없는 낮은 기단을 놓고 장초석을 높이 세워 그 위에 건물을 놓은 독특한 형태였다. 「동궐도」상에 나타난 희정당의 모습은 누각식의 건물이 전면에 묘사되어 있고 건물로 오르는 사다리 여럿이 설치되어 있는 형태이다. 이는 조선시대 궁궐의 일반적 형태는 아닌데 계단이 아닌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다는 것은 일상적인 용도는 아님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남면한 희정당의 전면을 주 출입 공간으로 한 것이 아니라 뒤쪽 대조전과 마주 보는 쪽이 주출입구였을 가능성이 높다. 희정당 후면 서쪽 행각에 놓인 복도각이 대조전과 연결되는 ‘선평문’에 닿는 것 또한 대조전과의 관계를 추측하게 한다. 또한 희정당은 일반적인 편전과 달리 전돌 바닥이 아닌 온돌과 마루로 구성된 좌식의 편안한 편전이었다.

1917년 대조전의 화재로 함께 소실된 희정당은 1920년 12월 일본인들에 의해 크게 변화된 형태로 지금에 이르렀다. 경복궁의 강녕전을 그대로 이건해 오면서 건물의 골격은 조선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러나 사용 방식과 설비, 내부 형태 등은 서양풍으로 꾸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희정당으로 변하였다.

현재의 희정당은 경복궁의 강녕전(康寧殿)을 그대로 이건해 오면서 정면 11칸, 측면 5칸, 전체 55칸의 규모이고 더불어 외관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5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집을 놓았고 이익공,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었다. 원래 용마루 없는 무량각 집인 강녕전을 이건하여 용마루를 얹었다. 내부는 크게 변하여 응접실, 회의실, 욕실 등을 배치하여 꾸몄고 거실에는 서양식 가구를 놓았다. 거실 양쪽 벽 상부에 1920년 가을, 순종의 명으로 해강(海崗) 김규진(金奎鎭)이 그린 폭 8.85m, 높이 1.8m의 「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와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가 각각 그려져 있다.

형태

지금의 희정당은 강녕전을 골격으로 하고 있지만, 일제 강점기 변형된 집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순조 때까지 조성된 희정당을 설명하고자 한다. 순조시기에 편찬된 『궁궐지』는 희정당의 모습을 꼭지가 맞물린 연꽃이 즐비하게 피어 있는 아름다운 전각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1647년(인조 25)의 『창덕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修理都監儀軌)』에 따르면 희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전체 15칸으로 이익공, 겹처마의 팔작지붕이다. 평면은 동·서 양쪽에 온돌이 6칸, 중앙과 전면에 걸쳐 마루 9칸으로 되어 있으며 천장은 봉반자와 지반자로 마감하였다. 전면에 돌기둥인 장초석으로 띄워 놓은 한 칸 폭은 마루를 놓고 그 뒤로 물러난 지점부터는 바닥 기초를 쌓아 건물이 앉혀져 있었다. 온돌을 놓기 위해서 건물 전체를 띄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동궐도형(東闕圖形)」을 살펴보면 순조 때 재건된 희정당의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3칸, 전체 15칸으로 규모와 외관은 동일하다. 그러나 내부는 전면 5칸에 마루가 깔리고 후면 가운데 3칸의 툇마루를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방(房)으로 표기되어 있다. 인조 때 재건된 희정당과는 내부의 구성을 달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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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誌)』
  • 『다산집(茶山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홍재전서(弘齋全書)』
  • 『황성신문(皇城新聞)』「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흥정당선온도(興政堂宣醞圖)」
  • 박정혜, 『조선시대 궁중기록화연구』, 일지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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