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운수(朴雲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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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97년(정조 21)~1841년(헌종 7) = 45세]. 조선 후기 순조~헌종 때 활동한 문신·학자이다. 순흥부사(順興府使)를 지냈다. 자는 경룡(景龍)이고, 호는 덕은(德隱)·죽계(竹溪)이며,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조부는 박윤원(朴胤源)이고, 조모 김씨(金氏)는 김시관(金時筦)의 딸이다. 아버지는 서흥부사(瑞興府使)박종여(朴宗輿)이며, 어머니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이규복(李奎復)의 딸이다.

순조 · 헌종 시대 활동

그는 어릴 때 성리학자인 친할아버지 박윤원에게 글을 배웠다. 과거에 여러 차례 실패하고 음보(蔭補)로 1822년(순조 22)에 사용(司勇)이 되었다. 그해 12월에 박수빈(朴綏嬪)의 장례 때 종척집사(宗戚執事)로 차출되었다. 1823년(순조 23)에 태릉(泰陵)참봉(參奉)이 되었고, 그 뒤 사과(司果)·빙고(氷庫)별제(別提)가 되었다. 이어서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돈녕부(敦寧府) 판관(判官), 예산현감(禮山縣監), 문화현령(文化縣令) 등이 되었다. 1829년(순조 29)에 가평군수(加平郡守)가 되었고, 1833년(순조 33)에 거창부사(居昌府使)가 되었으며, 뒤에 순흥부사 등이 되었다. 그가 수령으로 있는 동안 실정(失政)을 많이 고쳐 주민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특히 순흥부사 때에 2만 6천여 석의 허위로 보고된 환곡(還穀)을 정리하여 부민들이 선정비를 세웠다. 그는 1841년(헌종 7)에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덕은유고(德隱遺稿)』 3권이 있다. 글씨에 뛰어났는데, 금석문자도 남아 전한다.

가족

부인 유씨(兪氏)는 감역(監役)유문주(兪文柱)의 딸인데, 자녀는 1남을 낳았다. 1남은 박제근(朴齊近)이다.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 『덕은유고(德隱遺稿)』
  • 『진신보(縉紳譜)』
  • 『아산현읍지(牙山縣邑誌)』
  • 『반남 박씨 오세유고(潘南朴氏五世遺稿)』
  • 『한국인(韓國人)의 족보(族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