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여량(朴汝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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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4년(명종 9)~1611년(광해군 3) = 58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 활동한 문신.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을 지냈다. 자는 공간(公幹)이고, 호는 감수재(感樹齋)이다. 본관은 삼척(三陟)이고 거주지는 함양(咸陽)이다. 아버지는 승사랑(承仕郞)박현좌(朴賢佐)이고, 어머니 합천 이씨(陜川李氏)는 충순위(忠順衛)이숙(李淑)의 딸이다. 노상(盧祥)의 문인이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600년(선조 33) 별시(別試)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그 해 9월에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었고, 그 다음 해인 1601년(선조 34) 2월에 다시 예문관 검열이 되었으며, 그 해 12월에 예문관 봉교(奉敎)가 되었다. 1602년(선조 35) 윤2월에 병조 좌랑(佐郞)이 되었고, 그 해 8월에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가 되었다. 1604년(선조 37) 2월에 북청판관(北靑判官)이 되었고, 그 해 9월에 경기 양재찰방(京畿良才察訪)이 되었다. 1607년(선조 40) 7월에 형조 정랑(正郞)이 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 8월에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고, 그 해 10월에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으며, 그 해 12월에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1609년(광해군 1) 1월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문학(文學)이 되었고, 그 해 2월에 다시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1610년(광해군 2) 11월에 사간원 헌납이 되었다. 1611년(광해군 3) 2월에 사헌부 지평이 되었고, 그 해 7월에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이 되었으며, 그 해 8월에 다시 세자시강원 문학이 되었다. 같은 해 세상을 떠나니 나이 58세였다.

그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곽재우(郭再祐)가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격문을 돌려다. 또 <정유재란(丁酉再亂)>에는 의병으로 황석(黃石)에 들어가 여러 고을에 통문을 돌려 군량을 조달하였다.

학문과 교유

평생을 성리학과 『대학(大學)』의 무자기(毋自欺)에 심혈을 기울였고, 정온(鄭蘊) · 오장(吳長) · 박이장(朴而章) · 박성인(朴成仁) 등과 교유하였다. 저서로는 『감수재문집(感樹齋文集)』이 있으며,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추증과 후손

1613년(광해군 5)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부인 진주 정씨(晋州鄭氏)는 정기(鄭棄)의 딸로 자녀는 1녀를 낳았는데, 1녀는 김위(金瑋)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감수재문집(感樹齋文集)』
  • 『국조방목(國朝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