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량(朴遂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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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75년(성종 6)~1546년(명종 1) = 72세]. 조선 중기 연산군~중종 때 활동한 학자. 사섬시(司贍寺)주부(主簿)를 지냈다. 자는 군거(君擧)이고, 호는 삼가정(三可亭)이다. 본관은 강릉(江陵)이고, 거주지도 강릉이다. 아버지는 박승휴(朴承休)이고, 어머니 이씨(李氏)는 감찰(監察)이중원(李仲元)의 딸이다.

연산군~명종 시대 활동

1504년(연산군 10)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어머니 상을 당한 뒤로는 과거(科擧)를 보지 않았다. 연산군이 3년상례법(三年喪禮法)을 폐하고 상기를 단축한 단상법(短喪法)을 정하여 엄히 하였으나 그는 어머니 상을 당하여 시제(時制)에 불구하고 선왕(先王)의 제도를 어길 수 없다 하며 상복을 입고 3년 상기(喪期) 동안 여막에 살았다.

1516년(중종 11) 가을 김정(金淨)이 풍악산(楓嶽山)에서 오는 길에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김정은 며칠을 머물다가 작별할 때 그에게 척촉장(躑躅杖)을 주며 시(詩)를 짓기를 “깊은 산 층암절벽에 찬서리 흰눈을 겪은 가지일세. 가지고 와서 그대에게 주노니 오래도록 이 마음 간직하게나.” 라고 하였다. 그가 화답하기를, “참뜻을 잃을까 의심스러워 궁촌에 살고 있으나 곧은 성품 남몰래 간직했으니 정의를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으리.” 라고 하였다.

그는 뒤에 현량(賢良)으로 일컬어져서 용궁현감(龍宮縣監)에 제배되었다. 그때 용궁현에는 송사가 많았으나 판단을 명석하고 빠르게 하여 적체된 송사가 없었다. 1518년(중종 13) 사섬시 주부가 되었다. 1519년(중종 14) 겨울에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파직되어 고향인 강릉으로 돌아왔다. 당숙인 박공달(朴公達)과 쌍한정(雙閑亭)에서 시주(詩酒)와 담론으로 여생을 보내다가 1546년(명종 1)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72세이다. 저서로는 『삼가집(三可集)』이 있다.

성품과 일화

박수량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천성이 순수하며 후하고, 지조가 구차하지 않으며 소박하고, 말수가 적어 꾸밈이 없고 효행이 있었으며 뜻이 독실하였다. 1544년(중종 39)에는 강릉부사(江陵府使)박광우(朴光佑)가 민중을 애호하는 마음이 전 사람들의 배나 되므로 앞당겨 체직될까 하여 조정에 전달(轉達), 장려하는 특전을 내리게 해주었으면 한다는 상소를 올리는데 주동하기도 하였다.

정문과 배향

<중종반정> 후에 고향에 효자정문(孝子旌門)이 세워졌고, 1645년(인조 23)에 향중이 사당을 세워 향사를 지냈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기묘록 보유(己卯錄補遺)』
  • 『청선고(淸選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한국인(韓國人)의 족보(族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