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길응(朴吉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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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8년(선조 31)~ 미상]. 조선 중기 인조~효종 때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이다. 자는 덕일(德一)이고, 호는 진정재(眞精齋)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증조부는 박억년(朴億年)이고, 조부는 박세민(朴世敏)이다. 아버지는 현감(縣監)박신(朴信)이며, 어머니 전주최씨(全州崔氏)는 최철견(崔鐵堅)의 딸이다. 부인 고흥유씨(高興柳氏)는 유철(柳澈)의 딸이고 아들은 박흥문(朴興文)이다. 이안눌(李安訥)의 문인이다.

인조·효종 시대 활동

1624년(인조 2)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과 진사(進仕) 두 시험에 모두 합격하였다. 음보(蔭補)로 찰방(察訪)이 되었다가, 1634년(인조 12)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638년(인조 16) 7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 1641년(인조 19) 6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고, 1642년(인조 20) 4월 다시 정언이 되었다. 1647년(인조 25) 9월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 1648년(인조 26) 1월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다가 삼척부사(三陟府使)가 되었다.

1651년(효종 2)에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고, 1652년(효종 3) 2월 보덕(輔德)이 되었으며, 6월 승정원 승지가 되었다. 나중에 참판(參判)에 올랐다.

성품과 일화

박길응은 학문을 매우 좋아하여 성인이 되는 방법, 곧 학행일치(學行一致)의 법을 연마하였다. 장현광(張顯光)을 사사(師事)하였는데, 그가 지은 「우주요괄(宇宙要括)」을 상고하여 잘못된 곳을 고쳐 임금께 차기(箚記)를 붙여 올렸다. 또 그는 안회(顔回)의 일생을 연구하고 그의 장점을 표출하여 『학안록(學顔錄)』이라 이름을 붙이고, 또 자기의 의견서를 첨가하여 임금에게 올려 인정을 받았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여헌집(旅軒集)』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