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거겸(朴居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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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13년(태종 13)~1481년(성종 12) = 69세]. 조선 전기 세종~성종 때 활동한 무신. 행직(行職)은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이고, 봉작(封爵)은 밀산군(密山君)이다. 자는 중공(仲恭)·공익(公益)이고, 호는 지산(地山)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아버지는 증 호조 판서(判書)박경빈(朴景斌)이고, 어머니는 풍천노씨(豊川盧氏)이다.

세종~단종 시대 활동

1432년(세종 14)에 문음으로 별시위(別侍衛)에 배속되었고, 1439년(세종 21)에 뽑혀서 내금위(內禁衛)에 배속되었다. 1442년(세종 24) 8월 호군(護軍)으로서 무과(武科)에 장원 급제하여 오위 대호군(五衛大護軍) 겸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우익위(右翊衛)로 임명되었다가 곧 훈련관(訓鍊觀) 지사(知事)로 옮겼다. 1443년(세종 25)에 북청도호부사(北靑都護府使)로 나갔다가 1447년(세종 29)에 돌아와, 훈련관 사(事)가 되었다.

1449년(세종 31)에 경흥 도호부사(慶興都護府使)로 임명되었는데, 그 때 야인(野人)들이 국경을 침범하였다. 박거겸이 출병(出兵)하여 먼저 적을 많이 사로 잡으니, 세종(世宗)이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를 더하고 옷을 내려 주어서 그를 포상(褒賞)하였다.

1451년(문종 1)에 대호군(大護軍)에 임명되었다.

1453년(단종 1) 7월 경상좌도 처치사(慶尙左道處置使)에 제수되었고, 1454년(단종 2)에 들어와서 중추원(中樞院)첨지사(僉知事)에 임명되었다.

세조~성종 시대 활동

1455년(세조 1) 윤6월에 또 중추원 첨지사에 임명되었고, 12월에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57년(세조 3)에 세조(世祖)가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활 쏘는 것을 구경할 때, 박거겸이 연달아 세 화살을 쏘아 과녁을 맞히니,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중추원 부사(副使)를 제수하였다. 1459년(세조 5) 12월에 중추원 행 첨지사가 되고, 1460년(세조 6) 7월에 중추원 첨지사가 되었다. 1462년(세조 8) 2월에 안주판목사(安州判牧事)로 임명되었다.

1469년(예종 1) 3월에 강릉부사(江陵府使)로 임명되고 절도사(節度使)를 겸하였으며 5월에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로 임명되었다.

1471년(성종 2) 3월에 순성 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의 칭호를 하사받고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졌다. 1473년(성종 4) 6월에 겸 경상우도 병마절도사(兼慶尙右道兵馬節度使)로 임명되었고, 1477년(성종 8) 11월에 자헌대부(資憲大夫)밀산군(密山君)이 되었다. 1479년(성종 10) 1월에 자헌대부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임명하였으나, 박거겸이 노병(老病)이라 하여 사직하니, 개차(改差)하였다. 1481년(성종 12) 2월에 자헌대부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으나 5월 29일 병으로 관(官)에서 돌아가니, 나이가 69세였다.

묘소와 시호

시호는 평간(平簡)이다. 묘소는 현재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 산 107번지에 있다. 그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형의 아들 박종형(朴宗亨)을 그 후사(後嗣)로 삼았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안산시사편찬위원회, 『안산시사』, 안산시,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