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악(武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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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武功)을 칭송하여 만든 기악·노래·춤.

개설

조선초기의 무악(武樂)은 제작된 기악[樂]·노래[歌]·춤[舞]이며 「납씨곡(納氏曲)」, 「궁수분곡(窮獸奔曲)」, 「정동방곡(靖東方曲)」, 「정대업(定大業)」이 대표적이다. 각종 제례에 수반되는 무무(武舞)도 무악의 범주에 포함된다.

연원 및 변천

조선시대 무악은 조선 건국 과정에서 발생한 몽골의 나하추와 왜구 격퇴를 찬미하면서 만들어졌다. 세종대에는 「정대업」이란 작품에 역대 조종의 무공을 투영시켜 제작한 후 왕과 신하들이 함께하는 연회인 회례(會禮)에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정대업」은 편곡 과정을 거쳐 세조대부터 종묘제례악으로 활용되면서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즉 무악은 조선의 건립과 연계되어 조선초기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고, 그중 「정대업」은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에도 종묘 제례를 거행할 때 연주되고 있다.

절차 및 내용

무악은 조선초기에 집중적으로 조명받았다. 태조대에는 무악을 관장하는 별도의 기관을 둘 정도로 중시되었다. 기관 명칭은 무공방(武工房)이다(『태조실록』 2년 10월 9일). 무공방에 소속된 무공(武工)들은 무업을 형상화한 음악·노래·춤을 맡았으며, 특히 무무를 전문적으로 맡았다. 무무는 1116년(고려 예종 11)에 송나라에서 유입된 대성아악(大晟雅樂)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대성아악 유입 이후부터 제례에서 무무를 춤추었고 조선시대에도 지속되었다. 조선초기 무공은 각종 제례에 수반되는 무무를 연행하는 역할을 중심으로 행하면서, 새로 만들지는 무악까지 겸하였다(『태조실록』 2년 10월 27일).

무악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로는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납씨곡」, 「궁수분곡」, 「정동방곡」을 들 수 있다(『태조실록』 2년 7월 26일). 「납씨곡」은 태조가 원나라 무장인 나하출[納哈出]을 쫓은 공을, 「궁수분곡」은 태조가 왜구를 물리친 공을, 「정동방곡」은 군사를 돌이킨 공을 각각 찬양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납씨곡」은 「납씨가(納氏歌)」라는 곡명으로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와 『대악후보(大樂後譜)』에 악보가 기록되어 있으며, 「정동방곡」은 『대악후보(大樂後譜)』에 악보가 남아 있다.

세종대에 만든 「정대업」도 주목된다. 「정대업」은 태조의 사대조에서부터 태조와 태종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무공을 기악·노래·춤으로 형상화한 무대예술이다. 소무·독경·선위·탁령·혁정·신정·개안·지덕·휴명·순응·정세·화태·진요·숙제·영관, 이상 15개로 구성되어 장시간 연행될 수 있는 대규모의 작품이었다(『세종실록』 29년 6월 4일). 세종대 창작된 「정대업」의 음악은 『세종실록』 「악보」에 기보되어 있다.

무악은 무력으로 정권을 획득한 태조의 행위를 창작의 소재로 활용하여 탄생시킨 공연 예술이다. 조선 건국 초기에 적극적으로 만들어 연행함으로써 그 정당성을 예술로 공인 받는 방식으로 활용하였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악학궤범(樂學軌範)』
  •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
  • 『대학후보(大樂後譜)』
  • 국립문화재연구소, 『종묘제례악』, 민속원, 2008.
  • 송방송, 『증보한국음악통사』, 민속원, 2007.
  • 송혜진, 『한국아악사연구』, 민속원, 2000.
  • 장사훈, 『國樂論攷』, 서울대학교출판부,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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