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곡(貿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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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물자를 가지고 곡물을 사는 것.

개설

화폐경제가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조선 사회에서는 재정 운영과 민간 거래가 동전·곡물·포(布) 등 다양한 교환 단위를 통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국가의 조세도 다양한 형태의 물품으로 거두어들였다. 재정 운영 과정에서 많은 곡물이 필요할 경우, 정부는 다른 물종을 시장 거래를 통해 곡물로 바꾸어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무곡이라 하였다. 무곡은 재정 운영이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행하여졌는데, 이 과정에서 각 지역별 시세 차이를 통한 이익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후기 환곡 운영 과정에서 감사·수령·서리에 의해 무곡을 통해 이자를 받는 취식(取息) 행위가 종종 발생하였는데 이를 이무(移貿)라고 하였다(『정조실록』 5년 12월 28일).

연원 및 변천

무곡은 조선초부터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조선전기에는 다른 물종으로 거둔 국가 세입을 주로 군자곡(軍資穀) 등의 비축곡을 마련하기 위하여 곡물로 바꾸었다. 혹은 어염세와 같이 본래 해당 물종의 현물을 납입하던 세를 보관하기 편하도록 곡물로 바꾸어 납입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에는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으로 다양한 종류의 공물 납부가 사라지고 대신 곡물과 포·동전으로 세금을 납부하여 수취 물종이 간결해졌다. 이에 따라 물종 간 시세 차익 등을 이용하여 조세 납입 과정에서도 관(官)과 민(民)에 의한 무곡이 활발히 일어났다. 19세기에는 환곡 원곡을 가지고 무곡을 통해 이익을 노리는 행위가 만연하기도 하였다.

내용

조선은 토지 생산물, 즉 곡물로 수취되는 전세(田稅)와 각종 현물인 공물(貢物)·진상(進上), 포(布)로 수취되는 노비 신공(奴婢身貢) 등을 기반으로 재정이 유지·운영되었다. 그런데 기근으로 인해 진휼곡을 지급해야 하거나, 국방상의 이유로 군량미를 확보해야 할 경우, 그리고 외국 사신을 접대해야 할 경우 등 국가가 거두어들인 세입 이상의 곡물이 소요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였다. 이럴 경우 국가에서는 여타의 물건을 가지고 무곡을 통해 곡물을 확보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군량미 확보가 국가 현안 중 하나였는데, 당시에 군량을 확보하는 가장 현실적 방안 중 하나가 바로 무곡이었다(『선조실록』 27년 7월 16일).

한편으로는 수세 과정에서 무곡하도록 규정한 경우도 있었는데, 어전세(漁箭稅)·염세(鹽稅)가 대표적인 경우였다(『성종실록』 16년 9월 16일). 『경국대전』에 의하면 이들 어염 생산자들은 생산된 물품의 일정량을 국가에 세(稅)로 납입하도록 하였는데, 현물을 곡식으로 바꾸어 납입하도록 하였다. 이미 국가에서는 공물 수취 등을 통해 중앙에서 필요한 양의 생선과 소금을 확보하고 있었고, 따라서 현물세를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곡물이 어염보다 보관이 편리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전세·대동미(大同米)를 운반하는 과정에서도 시세 차익에 따른 무곡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세를 납입하는 고을의 곡물 가격이 비싸다면, 좀 더 싼 고을에서 곡물을 구입하여 세를 납입하였다. 이러한 무곡은 주로 조세를 수송하는 선운업자(船運業者)를 통해 일상적으로 일어났는데, 이들은 여러 고을의 시세 차익에 대한 정보를 수집·활용하여 큰 이익을 남기기도 하였다.

환곡 운영에서도 무곡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곡물 값이 비싼 고을에 환곡 원곡을 모두 팔아 동전으로 바꾼 후 시세가 싼 고을에서 같은 양을 구입하고 차익을 챙기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것을 이무라고 하였는데, 불법적으로 행해지는 무곡의 한 형태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문용식, 『조선 후기 진정과 환곡 운영』, 경인문화사, 2001.
  • 정약용 저; 다산연구회 역주, 『(역주)목민심서 3』, 창작과비평사, 1981.
  • 김훈식, 「조선 초기 의창 제도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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