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침(廟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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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사당을 높여 부르는 말로서 유교적 건축의 기본 형식을 일컫기도 함.

개설

묘침(廟寢)은 일반적으로 종묘(宗廟)를 가리킨다. 그러나 공적 공간인 ‘묘’와 사적 공간인 ‘침’이 앞뒤로 결합된 유교적 의례 공간의 기본 형식을 일컫기도 한다. 유교 건축의 기본 형식으로서 묘침제란 전면의 묘와 후면의 침이 문과 담장으로 둘러싸이는 배치 형식을 가리킨다. 묘는 정면 5칸, 침은 정면 3칸 규모로서 가운데 당(堂)을 두는 것이 공통점이다. 묘침제는 조선 건국 초기에는 건물을 영건하는 데 있어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지만 임진왜란 이후 17세기에 이르러 궁궐, 주택, 서원 건축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내용 및 특징

‘침’은 일반적으로 왕의 거처를 일컫는 말로서 살아 있을 때와 죽은 다음의 시설에 동일하게 붙는 이름이다. 즉, 생전에 거처하는 시설은 정침(正寢), 연침(燕寢), 노침(路寢) 등으로 구분하고, 사후 시설은 매장 시설인 능침(陵寢)과 사당 시설인 묘침으로 구분한다. 이때 묘침은 죽은 이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시설로서 태묘(太廟) 혹은 종묘와 같은 의미이다.

한편, ‘묘’와 ‘침’은 고대 중국에서 의례 공간을 구성하는 건물로서 특별한 건물 형태와 배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이후 지속적인 건축사적 논쟁을 불러왔던 개념이기도 하다. 유학자들은 고대 하(夏)·상(商)·주(周) 삼대의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로 인식하고 이 시기의 각종 제도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를 밝히고자 노력해 왔다. 이 중 건물들의 배치와 건물 내 공간 구성, 해당 공간에서 각종 의례가 어떻게 행해져야 하는지에 대해 오랜 시간 동안 논쟁해 왔다. 이러한 제도로서의 건축에 관한 담론을 궁실제(宮室制) 혹은 유가궁실제(儒家宮室制)라고 한다. 유가궁실제를 이루는 논의 역시 몇 가지로 나뉜다.

그러나 건물의 형태만을 가지고 구분한다면, 유가궁실제를 통틀어 두 가지의 건축 형식만이 남게 된다. 즉 명당(明堂)과 묘침의 건축 형식이다. 다른 건축 제도는 두 가지 건축 형식을 그대로 모방하거나 축소해서 지어질 뿐이었다. 이 중 명당이 특별히 천자에 한정된 건축 형식이라면, 묘침은 모든 계층에 보편적으로 적용된 건축 형식이다. 유교적 세계관에서 죽은 자의 건축과 산 자의 건축은 일치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죽은 자가 거처하는 종묘와 산 자가 거처하는 정침·연침 등에는 동일한 건축 형식인 묘침제가 적용되었다.

묘침제는 묘와 침, 그 일곽을 둘러싸는 문(門)과 담으로 이루어진 건축 형식으로 정리된다. 여기서 묘는 공식적인 활동이 일어나는 공간이며, 침은 비공식적인 활동, 연거(燕居)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산 자의 공간에 적용될 경우 묘는 정침, 노침 등의 이름으로 정사(政事)를 하거나 재계를 하는 의식적(儀式的) 공간이 된다. 침은 연침이란 이름의 연처(燕處) 공간이 된다. 죽은 자의 공간에서 묘는 신주를 봉안하고 제례(祭禮)를 벌리는 행례 공간이 되며 침은 죽은 자의 유물을 안치하는 장소가 된다. 묘와 침은 항상 묘가 앞에 놓이고 침이 뒤에 놓이는 전묘후침(前廟後寢)의 배치를 기본으로 해서, 공적인 공간을 전면에 두고 사적인 공간을 후면에 두는 공간 구성의 원칙을 만들어 냈다(『세종실록』 30년 7월 19일).

묘와 침의 기본적인 평면에서 그 공통적인 특징을 추출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선 당(堂)의 공간이 독립된 원기둥[楹] 두 개와 함께 전면으로 개방되어 있다. 그 뒤로는 3칸의 개실(開室)이 위치하며, 그 좌우로는 벽을 막고 협실을 둔다. 이렇게 하여 전면 5칸에 측면 3칸의 평면이 완성된다. 이것은 묘에 해당하는 건축이고 그 뒤에 위치하는 침에 대해서는 『이아(爾雅)』「석궁(釋宮)」편에서 상(廂)의 유무로 구분하고 있다. 즉, 상이 있으면 묘, 없으면 침이라 하였다.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이 『가례집람(家禮輯覽)』에 실은 「침묘변명도(寢廟辨名圖)」에서는 문과 묘와 침으로 구성된 예제 건축의 기본 구성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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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묘침제를 비롯한 유가궁실제에 대한 이해는 임진왜란 이후 종묘 재건에 관한 논의에서 크게 발전하였으며 17세기에 만개하였다. 특히 종묘를 전묘·후침·문으로 구성된 묘침제의 건축 형식으로 재건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그중 유생을 대표하던 김장생의 안은 예제의 원칙을 주자 예학의 입장에서 철저하게 적용한 이상적인 계획이었다. 이후 홍문관(弘文館)에서 나온 안은 논의가 진행되면서 제기된 문제들을 일정하게 해결하고 있는 현실적인 계획안이었다. 이 두 가지 계획안은 기존 지형에 묘침제로 종묘를 재건하려면 상당히 큰 공역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안들이 제시되었던 이유는 묘침제가 갖는 상징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묘침제는 예(禮)라고 하는 이상이 각인된 건축 형식으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예치(禮治)로써 전 사회를 조직하여 대동사회를 이루고자 했던 17세기 조선의 사림들에게 묘침제는 하나의 이상적인 건축 형식으로서 수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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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궁궐에 있어서 적어도 태조·태종 연간의 경복궁과 창덕궁 창건에는 묘침제를 비롯한 유가궁실제의 논의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대의 국가의례 정비를 통해 예학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진척되었기 때문에, 이후로 궁실제 이해의 실마리가 마련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심화된 묘침에 관한 이해 수준은 궁궐 건축에 반영되었다. 전체 배치의 문제보다는, 전각 평면의 구성에서 궁실 제도의 이해와 궁궐 운영의 경험에 의한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조선시대의 궁궐 건축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평면형은 중앙에 3칸의 청(廳)을 두고 좌우에 온실(溫室)을 배치하는 형식이다. 이러한 평면형은 고대 묘침 평면과 형태적으로 비슷할 뿐만 아니라 사용 방식도 비슷하여 묘침 제도에 대한 이해가 건축 평면의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주택 및 서원 건축에 대해서도 묘침제에 대한 이해가 영향을 주었다. 중국 고대 주나라의 제도인 『의례(儀禮)』에 대하여 남송의 유학자인 주자(朱子)는 시대적인 요구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여 『가례(家禮)』를 저술하였다. 여기에서는 당시 특권의 상징이었던 가묘(家廟)를 사(士)와 서민(庶民)도 건립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행례 체계를 조직하였다. 이는 여러 계층 사람의 주거 공간이 묘와 침으로 구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였다. 또한 일상생활은 가묘를 중심으로 하는 관혼상제(冠婚喪祭)의 행례 체계로 전환되어야 했다.

조선에서는 16세기 이후 주자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한 재지사족(在地士族)들이 『가례』의 정침과 사당을 건립하기 시작했다. 17세기에 이르면 『가례』의 정침과 『의례』의 묘침제에 대한 이해의 정도가 더욱 깊어졌다. 예를 들어 김장생은 『가례집람』에서 『가례』의 정침이 고제(古制)인 묘침제가 변질된 것임을 파악하였다. 한편 사당과 정침이 실제 영건될 수 있도록 중국과 조선의 전통 건축의 차이에서 오는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후 『가례』의 제도 자체가 고제가 아니라는 이해가 깊어지면서 정침 제도는 주거보다는 서원(書院)과 같은 교육 시설에 적합하다는 인식으로 발전되었다.

참고문헌

  • 『가례집람(家禮輯覽)』
  • 『이아주소(爾雅注疏)』
  • 정기철, 「17세기 사림의 ‘묘침제’ 인식과 서원 영건」,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 조재모, 「조선시대 궁궐의 의례운영과 건축형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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