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침(燕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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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에서 왕의 일상적인 생활이 이루어지는 건물 영역.

개설

연침이란 천자(天子), 제후(諸侯), 경대부(卿大夫), 선비[士]의 주거 공간 중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공간을 말한다. 조선 궁궐의 경우 침전(寢殿)이 연침의 기능을 수행했다. 중앙에 3칸의 마루를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두는 특별한 평면 형식을 갖추었다. 조선중기 이후 연침에서의 활동이 증가하면서, 의례 활동의 중심이 되는 정침(正寢)의 기능을 통합하기도 했다.

내용 및 특징

중국 고대 하(夏)·상(商)·주(周) 삼대의 궁실 제도를 다룬 논의에서, 궁궐의 건축 형식을 다루는 논의로는 조문제(朝門制)와 노침제(路寢制)가 있다. 조문제는 의례(儀禮)를 행하는 외부 공간인 조(朝)와 이들 사이를 구분 짓는 출입구인 문(門)이 천자 및 제후의 경우 어떻게 배치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이다. 이에 비해 노침제는 천자 혹은 제후, 즉 궁궐의 주인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각 건물들이 어떻게 계획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이다. 노침은 공식적인 의식 장소인 정침과 일상적으로 한가로이 머무는 장소인 연침으로 크게 나뉜다. 성별에 따라 남자의 정침·연침 영역 그리고 여자의 정침·연침 영역이 별도로 건축된다.

천자와 제후의 경우 정침과 연침으로 몇 개의 건물로 지어야 하며, 어떻게 배치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주례(周禮)』「궁인(宮人)」편의 ‘육침(六寢)’, 「내재(內宰)」편의 ‘육궁(六宮)’에 나와 있다. 이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가 정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먼저,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대표적 유학자인 정현(鄭玄)의 해석이 있고, 다음으로는 중국 당(唐)나라 학자인 가공언(賈公彦)의 해석이 있다. 이들에 따르면, 천자의 경우 6침으로 앞에 정침이 1동, 뒤에 연침이 5동 세워진다. 부인도 천자와 같이 6궁으로 6침 후면에 배치되는데 앞에 정침이 1동 연침이 5동 세워진다. 연침 5동은 정침을 중심으로 그 후면에 각각 동북쪽, 서북쪽, 서남쪽, 동남쪽, 중앙에 위치한다.

제후의 경우 학자에 따라 세부 사항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천자의 제도를 반으로 줄인 것이 제후의 제도라고 하여 제후는 3침·3궁을 정론으로 본다. 그 근거는 『공양전(公羊傳)』·『곡량전(穀梁傳)』에서의 제후에 대한 주석과, 『예기(禮記)』의 「제의(祭義)」편에 대한 중국 후한의 학자 정현의 주석이다. 송대(宋代)까지는 침(寢)의 수에 있어서 제후의 3침은 정침 1동과 연침 2동으로 구성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후 청대(靑代)의 경학적(經學的) 발전을 통해 제후의 3침은 정침 1동을 제외한 연침의 숫자라는 해석이 자리 잡았다.

그러나 위와 같은 논의는 순수하게 이론적인 담론이었고, 실제 조선왕조의 궁궐 건축에서는 왕이 한가로이 머무는 연거(燕居)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먼저 수용했다. 『조선왕조실록』 기사 중 1395년(태조 4) 9월 29일 막 준공된 경복궁의 건축을 기록한 부분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부분이 연침 7칸과 그 주변의 현황이다(『태조실록』 4년 9월 29일). 10월 7일에는 이들 전각에 정도전(鄭道傳)이 이름을 지어 붙이는데, 이때도 궁궐의 이름을 경복궁이라고 한 다음 가장 먼저 붙이는 이름이 연침인 강녕전(康寧殿)이다(『태조실록』 4년 10월 7일). 다음으로 동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연생전(延生殿), 서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했고, 연침의 남쪽을 사정전(思政殿), 또 그 남쪽을 근정전(勤政殿) 등으로 이름을 지어 나갔다. 이때 다른 건축 개념인 정침, 노침 등은 등장하지 않는데, 이로 미루어 왕의 사적인 거처로서 연침 개념이 가장 먼저 정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 연침 개념은 정밀한 것이 아니었다. 연침과 정침은 다른 개념인데도 불구하고 두 개념을 혼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동일한 기능의 침전 건물에 대해 경복궁 창건 기사에는 ‘연침’이라 하였고, 이후 창덕궁 창건 기사에서는 ‘정침’이라 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궁궐을 정침, 노침, 연침의 영역으로 구분하는 고대 중국의 규범과는 달리 정전, 편전, 침전 등 건물을 중심으로 기능을 구분하는 조선시대 궁궐 공간의 특징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된다.

변천

조선 궁궐에서 연침 혹은 침전의 범주에 들어가는 전각은 왕과 중궁의 침소, 대비·왕대비·대왕대비 등의 침소인 대비전, 왕이 학문하는 건물 등의 여러 전각을 비롯하여 동궁전, 빈궁전 등 수없이 많은 유형의 전각이 해당한다. 더욱이 각 침전의 용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었기 때문에 분류와 해석에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왕의 침소만을 대상으로 하면 다섯 궁궐에서 각각 강녕전, 대조전(大造殿), 통명전(通明殿), 회상전(會祥殿), 함녕전(咸寧殿)을 연침이라 할 수 있다. 시대순으로 건물의 형태를 살펴보면, 태조 연간의 경복궁 연침에서는 청(廳) 3칸에 이방(耳房) 각 2칸이 좌우로 병렬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구성은 태종 연간의 창덕궁 정침청(正寢廳)의 구성에서 계승되었다. 특히, 조선전기 강녕전 터를 발굴하여 그 구조의 자취를 살펴보았을 때, 가장 나중 시기의 것에는 건물의 좌우에 툇간을 부설했다. 또한 전면에 3칸 폭의 월대가 더 건설되어 조선시대 연침의 전형적 평면을 보여 준다. 이후 광해군과 인조, 순조 연간에 크게 중수되었던 조선시대의 침전들은 각각의 건축 형체가 갖고 있는 편차를 해소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거의 동시에 진행된 순조 연간의 서궐과 동궐의 연침 영건 공사가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조선시대 침전의 공통된 구성 방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 중앙의 3칸 청(廳)을 구성의 기본으로 하였다. 이외의 전각들에서 중앙 2칸 청이 구성되기도 하는 것과는 달리 침전에서는 반드시 중앙의 3칸 청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청의 전면과 후면으로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다는 것도 공통된 사항이다. 둘째, 청 좌우로는 온돌방을 대칭으로 구성하였다. 동서의 온돌방 규모는 전각의 규모와 위상, 시기에 따라 1칸에서 3칸까지 나타나는데 전체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확장되는 경향이 보인다. 특히 광해군에서 인조대에 영건된 침전과 순조대 이후의 침전에서는 온돌방의 규모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온돌방 좌우의 툇간은 적정한 온돌방 규모의 확보를 위해 생략되기도 하였다. 셋째, 전면부에는 월대를 구성하여 내전 의례를 행할 때 활용했다. 특히 「서궐도안(西闕圖案)」의 회상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전면부 월대가 순조 연간에 영건된 회상전에 도입된 것은, 침전 건축 형식이 정형화하는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이다.

한편, 침전의 활용도가 점차 높아지면서 정침의 상징성을 부여 받았던 편전의 쓰임새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조선전기 경복궁에서 왕의 거처는 연침으로서의 강녕전과 정침으로서의 사정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침전에서의 활동 증가, 편전을 혼전으로 바꾸어 사용해 온 현실적인 문제, 온돌 난방의 생활적 요구 등이 맞물리면서 조선후기 창덕궁에서는 연침에 해당하는 대조전이 정침의 개념까지도 흡수해 갔다. 이는 의례를 중심으로 한 궁궐 건축 계획이 실제적인 생활에 중심을 두는 쪽으로 변화했음을 보여 준다.

참고문헌

  • 「서궐도안(西闕圖案)」『예기(禮記)』
  • 『주례(周禮)』
  • 정기철, 「17세기 사림의 ‘묘침제’ 인식과 서원 영건」,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 조재모, 「조선시대 궁궐의 의례운영과 건축형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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