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과(萬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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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무과에서 한꺼번에 1,000명, 많게는 10,000명 이상의 무사를 선발하던 광취무과.

개설

만과(萬科)는 조선후기 무과의 광취 현상을 말하였다. 조선시대에 고위 무관을 선발하던 무과는 3년마다 28명을 뽑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국방상에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긴급히 무사를 충원하는 방법으로 활용되었는데, 한꺼번에 1,000명 이상을 뽑는 무과를 만과라고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무과는 모두 770회 실시되어 약 150,000명을 선발하였는데, 그중 1,000명 이상을 선발한 만과는 13차례 시행되어 전체 선발 인원의 1/3에 해당하는 50,000여 명을 선발하였다. 만과는 조선시대 무과의 시행에서 그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무과는 평소에는 정해진 원칙과 절차에 따라 무관을 선발하였지만,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변화가 불가피했다. 문과와 무과를 균형적으로 시행한다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무과에서 만과 현상이 나타나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만과는 기본적으로 변방의 위협에 대비하는 부방(赴防) 군사를 충원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북방의 위협이 사라지면서 재정을 보충하는 방책으로 기능이 변화되어 갔다. 만과 출신자에게 부방 의무를 면제해 주는 대신 군포를 받아 국가 재정에 충당하였던 것이다. 이와 함께 만과를 군영의 무사를 확보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붕당정치 아래서 각 당파가 자파 세력의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군사적 기반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탕평 정치가 추진된 정조대에는 왕 자신이 만과를 추진하였다. 정조는 친위 병력인 장용영(壯勇營)의 무사를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만과를 시행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19세기에 들어와 외세 침탈의 위기 속에서 인심 수습과 국권 회복을 위한 목적으로 만과가 시행되는 배경으로 이어졌다.

변천

만과 설행의 배경은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6세기 중엽 이후 지방의 군사제도인 진관(鎭管) 체제가 무너져 각 진에 배치된 유방병(留防兵)만으로는 국방이 어려워지면서부터 무과에서 광취가 시작되었다. 1555년(명종 10)의 을묘왜변(乙卯倭變)과 1583년(선조 16)의 이탕개(尼湯介)의 난은 무과의 광취가 이루어지는 선례가 되었다.

남왜북적(南倭北狄)의 침입이 계속되자 조선 정부는 무과를 실시하여 긴급히 무사를 선발하여 전선에 투입하였다. 하지만 그 선발 인원은 500명을 넘지 않았다. 무과에서 1,000명 이상의 무사를 선발하는 직접적인 계기는 임진왜란의 발발이었다. 조선 정부는 전대미문의 국가 위기 속에서 전선을 방어할 부방군을 확보하기 위하여 광취무과를 감행하여 적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의 무사를 선발하였다.

임진왜란 중 무사 대량 시취(試取)의 경험이 선례가 되어 이후 긴급한 사태가 벌어질 때마다 다양한 명칭의 별시(別試)를 실시하여 한꺼번에 많은 무사를 뽑았다. 전란을 전후로 군사 체제가 와해되자 부방군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는 무과의 광취를 지속시키는 배경이 되었을 뿐 아니라 더 큰 규모의 광취를 가능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만과의 명칭이 처음 등장한 것은 광해군대였다. 명(明)·청(淸) 교체로 국제 정세의 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서북면을 방비할 군사의 충원이 시급해졌다. 이에 따라 1620년(광해군 12) 1도에서 각 1,000명씩을 선발하는 광취무과가 시행되었는데, 전국적으로 10,000명을 뽑는다고 하여 만과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으나 실제 선발 인원은 3,200명이었다. 당시 뽑힌 만과 출신을 ‘출신군관(出身軍官)’이라 하였다. 이름 그대로 처음에는 군관의 임무를 띠고 변방에 파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후일 변방이 안정된 뒤에는 무과 출신자들에게 부방 의무를 면제해 주는 대신에 포를 받아 국가 재정에 충당하는 방식으로 변화되었다.

1637년(인조 15)에는 산성무과(山城武科)에서 5,464명을 선발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하였던 군사와 호종하였던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시험으로서, 당시 합격자 중에는 군공으로 천민 신분에서 벗어난 자들을 비롯한 다수의 천민이 포함되었다. 이때부터 훈련도감 내에 만과 출신으로 국출신(局出身)과 훈련별대(訓練別隊)가 만들어졌는데, 뒷날 만과를 활용해서 붕당의 군영 무사를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효종대에는 북벌을 위한 군비를 확장하기 위해서 만과를 설행하였다. 현종 말기에는 중국에서 오삼계(吳三桂)의 난이 일어나 희미해진 북벌 의지를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북벌을 위한 구체적인 방략의 하나로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를 설치하고 만과를 설행하고자 하였다.

1676년(숙종 2)에는 전국의 초시 합격자 48,000여 명을 대상으로 전시를 보아, 조선시대에 설행한 만과 중에 가장 많은 인원인 17,652명을 선발하였다. 그 후 18세기 말까지 한동안 시행되지 않다가 1784년(정조 8)에 정조 아들인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책봉을 축하하기 위한 경과(慶科)로 만과를 설행하여 2,600여 명을 선발하였다. 17세기의 만과가 주로 부방 군사를 확보하기 위해서 설행되었다면 18세기의 만과는 인심을 수습하는 동시에 친위군영의 군사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 활용되었다.

만과는 19세기에도 이어졌다. 1889년(고종 26)에 2,513명, 1894년(고종 31)에 1,147명을 선발하는 광취무과가 설행되었다. 모두 외세 침탈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동학농민혁명 등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민란에 따른 사회불안과 체제 불안을 수습하려는 위무적(慰撫的) 성격을 띤 만과였다. 이러한 만과 현상은 과거제도가 폐지된 1894년까지 계속되었다.

의의

조선후기 만과의 특징은 무엇보다 하층민의 신분 상승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점이다. 만과에는 양반 이하의 중인과 평민은 물론이고 서얼·공사천(公私賤)·잡류 등 이른바 서얼·천인의 진출이 두드러졌다. ‘상한출신(常漢出身)’과 ‘상천출신(常賤出身)’은 만과로 인하여 등장한 사회적 존재였다. 이들 하층민이 만과에 합격하였다고 하여 곧바로 관직을 얻진 못하였지만 신분 상승은 분명히 이루어졌다.

만과는 그동안 무과에 합격하지 못하였던 양반 사족에게도 손쉬운 관직 진출의 통로가 되었다. 만과에 무예 이외에 강서(講書)시험을 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조선 왕조는 만과를 통하여 양반 사족층을 흡수함으로써 지배층 내의 사회 불만 세력을 해소하고 능력 있고 문벌 좋은 젊은이를 고위 무관으로 발탁하고자 하였다. 만과 출신의 증가는 자연 무과 합격 이후 관직으로 나가는 데 있어서 각종 추천제를 발달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문벌 좋은 자제만이 관직으로 진출할 수 있었음을 의미하였다.

문치주의를 지향하던 조선왕조는 국방력의 취약성을 만회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만과를 시행하였다. 그것은 과거가 당대인들에게 최고의 명예였기 때문이다. 만과를 통하여 무사를 확보함으로써 군사력을 보충하는 동시에 새롭게 성장하려는 하층민들을 흡수함으로써 중앙집권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만과는 국방상의 이유로 시작되어 나중에는 재정적 이유와 군영 설치를 위한 무사 확보의 이유로 자주 시행되어 필요 이상으로 많은 무과 출신자를 양산하였다. 그 결과 천민 자제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무과를 천시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분제도의 혼란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수교집록(受敎輯錄)』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대동야승(大東野乘)』
  • 『무과총요(武科總要)』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무과방목(武科榜目)』
  • 『과거등록(科擧謄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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