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경장(磨鏡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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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부에 등록되어 공조(工曹)상의원(尙衣院)에서 거울을 만들거나 금속제 기물의 표면에 윤을 내던 장인.

개설

고려시대에는 구리로 거울을 만들던 경장(鏡匠)이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경장으로 이어졌다. 조선시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경공장(京工匠)으로 거울을 만들던 경장이 공조와 상의원에 각각 2명씩 속해 있었다. 경장이 만든 거울이나 악기 및 무기 등 금속제 표면을 갈아 윤을 내던 마경장(磨鏡匠)은 경장과 함께 조선초기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마경장은 경장에서 분화되었다고 여겨진다. 이후 조선후기에 경장은 『대전통편(大典通編)』, 『대전회통(大典會通)』 같은 법적 규정에는 여전히 존속하나 별다른 용례로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조선후기에 각종 왕실 행사를 위해 임시로 설치한 권설도감에는 마경장으로 동원되었고, 그들은 이후 마광장(磨光匠)으로 세분화되었다.

담당 직무

마경장은 금속제 표면을 곱게 갈아 거울처럼 매끈하게 만드는 일을 하였다. 곧 왕실의 각종 행사 때 왕권을 상징하는 보인(寶印)이나 제사·행사에 필요한 각종 그릇이나 음악을 연주하기 위한 악기 등 금속제 물품의 표면에 윤을 내는 신역(身役)을 수행하였다.

병조에 소속되었던 마경장 15명은 3번으로 나뉘었고, 주성장을 비롯한 조각장까지 총 156명에 체아직(遞兒職)은 부급사(副給事) 1명이었다.

조선후기에 왕실의 행사를 위해 도감에서는 마경장이 거울이나 악기 등 금속제 기물의 표면을 갈기 위한 도구를 마련해주었다.

변천

고려시대에는 장야서(掌冶署)에 경장이 있었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경장은 행수교위 1명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에 의하면 경장은 공조에 2명, 상의원에 2명 총 4명이 관장(官匠)으로 소속되어 있었다. 이러한 경장과 달리 마경장은 금속제 거울이나 기물의 표면을 반들반들하게 윤을 내는 역할을 하였다. 1460년(세조 6) 병조에는 주물을 부어 무기를 만들던 주성장(鑄成匠), 징과 꽹과리를 만들던 쟁장(錚匠), 북을 만들던 고장(鼓匠)과 함께 마경장 15명이 소속되어 있었다(『세조실록』 6년 8월 1일). 이처럼 마경장은 초기에는 무기를 만들 때 표면을 정리하는 일을 하였다가, 16세기 초부터는 거울을 가는 일에 종사하게 되었다. 1504년(연산군 10)에 마경장 15명이 흥청 등 기생들에게 제공할 거울의 표면을 가는 일이 지체되자 공조와 상의원 관원들이 국문을 받았다(『연산군일기』 10년 1월 14일). 조선후기에는 왕실 행사 때마다 설치하였던 도감에 징발되었던 마경장을 통해 그들의 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 마경장은 왕실의 각종 행사 때 왕권을 상징하는 보인이나 제사·행사에 필요한 각종 그릇이나 음악을 연주하기 위한 악기 금속제 물품의 표면에 윤을 내기 위해 동원되었다. 이들은 1604년부터 1907년까지 설행된 많은 도감에 동원되었다. 그들 중 20년 이상 오랜 기간 동안 도감에 징발되어 활동했던 대표적인 마경장의 처지는 시기별로 차이가 보인다.

18세기에 들어서면 마경장은 공조 소속의 관장이나 훈련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과 같은 군문(軍門) 소속으로서 도감에 차출되어 사역하였다. 이로 미루어 18세기 중엽부터 이미 사적인 생산에 종사하는 장인을 동원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에는 사장이었던 마경장이 사역하였으며, 마광장으로 분화되었다. 한말까지 존호도감(尊號都監)에 마경장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태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장경희, 『의궤 속 조선의 장인』, 솔과학, 2003.
  • 한우근 외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인문연구실 편, 『(역주)경국대전: 주석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