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탕평(大蕩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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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대 중반에 원경하 등이 당파를 초월해서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해 탕평을 이루자고 주장한 정치 운영론.

개설

조선후기 영조대 중반 이후 제기된 정치 운영론으로, 원경하(元景夏)가 주도하였다. 종전 노론과 소론 중심으로 탕평이 추진되던 것에 대해 회의를 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제시된 정치 운영론이다.

내용 및 특징

영조가 재위 전반기에 추진했던 탕평은 노론과 소론을 고루 기용하는 호대(互對) 또는 쌍거호대(雙擧互對)라는 방법을 통한 것이었다. 호대란 특히 정치적 권력이 있는 관직을 노론과 소론에게 의도적 배분하는 정치 운영술을 말한다. 1740년(영조 16) 경신처분(庚申處分)을 통해서 영조는 이전까지 자신을 둘러싸고 제기되던 경종(景宗)의 죽음과 관련된 혐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정국 운영의 방향을 선회하였는데, 이에 부응하여 제기된 것이 원경하가 주도한 대탕평론이었다(『영조실록』16년 6월 5일).

원경하는 먼저 당시까지 붕당을 합리화하던 구양수(歐陽修)와 주자(朱子)의 붕당론을 부정하였다. 이어 노론과 소론의 범위로는 인심을 복종시킬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동·서·남·북의 붕당 세력을 모두 아우르는 탕평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원경하의 주장에 따르면, 정국 주도 세력인 노론 측의 입장에서는 자신들만이 군자(君子)이며, 나머지 당인들은 모두 소인(小人)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당쟁이 확산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원경하는 노론과 소론 이외에도 남인과 소북 가운데서도 명분과 정치 의리와 관련이 없는 자는 능력에 따라 등용하자는 대탕평론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변천

원경하가 제기한 대탕평론은 1741년 신유대훈(辛酉大訓)이 반포된 뒤 소론 출신의 정우량(鄭羽良)과 조귀명(趙龜命), 남인 출신의 오광운(吳光運)을 비롯해 소북 세력 등과의 정치적 제휴를 통해 대탕평에 대한 공감이 확산되어 갔다. 일부에서는 대탕평을 반대하였으나, 대탕평론이 적용되어 탕평을 시도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남인 이맹휴(李孟休)의 등용이었다(『영조실록』18년 9월 18일). 이맹휴는 이잠(李潛)의 조카이자 이익(李瀷)의 아들이다. 삼촌인 이잠은 1706년(숙종 31) 당시 집권 세력이던 김춘택(金春澤)과 이이명(李頤命)이 세자를 비방했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곤장을 맞아 죽은 인물이다. 따라서 이맹휴의 등용은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것으로써, 대탕평이 현실 정치에 적용된 사례라 하겠다.

참고문헌

  • 이근호, 「영조대 탕평파의 국정 운영론 연구」, 국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 정만조, 「영조대 중반의 정국과 탕평책의 재정립: 소론 탕평에서 노론 탕평으로의 전환」, 『역사학보』111,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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