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담(茶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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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차리는 다과.

개설

다담(茶啖)은 원래 불가(佛家)에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내어놓는 다과(茶菓)를 가리키는 말이다. 고려시대에는 철저한 숭불사상으로 살생을 금하고 육식을 절제하여 다담상(茶啖床)에는 차와 병과(餠菓)가 올랐으나 조선시대에는 손님을 대접할 때 병과와 더불어 육류로 만든 음식을 함께 내었다. 궁중에서는 왕족이나 사신에게 접대하는 상과, 지방 관아에서 사신을 접대하는 상을 모두 다담이라고 하였다.

내용 및 특징

다담은 원래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내놓은 다과이고, 다과를 차린 상이 다담상이다. 한편 주물(晝物)은 존귀한 이를 대접하기 위해 간략하게 차려서 먼저 내오는 다담상이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주물은 주로 궁궐 내에서 이루어지는 잔치에 차린 상이고, 다담은 궁중에서 중국 사신을 대접하거나 지방 관아에서 사신을 대접하기 위해 차린 상인데, 둘의 내용적인 차이는 알 수가 없다.

변천

궁중에서 왕족이 병을 앓거나 상중(喪中)에는 다담상을 소략하게 하거나 차리지 않았고, 흉년에는 다담을 정지시켰다. 1624년(인조 2)에 왕이 편찮은 증후가 있어 다담을 소략하게 마련하여 올리게 하고, 또 대비전과 중전에게도 올리도록 하였지만,(『인조실록』 2년 2월 9일) 3일 후에는 대비전 이외에는 차를 바치지 못하게 하였다(『인조실록』 2년 2월 12일).

행행할 때 민폐를 줄이려고 다담을 올리지 말라고 하기도 하였다. 1627년(인조 5) 왕이 육경원(毓慶園)을 참배할 때 다담은 반드시 민폐가 되니, 각 관아로 하여금 마련하지 말도록 하였고, 환도할 때 연도(沿道)의 각 고을에서 다담을 진설하지 말도록 하였다(『인조실록』 5년 4월 8일). 숙종대에도 대가(大駕)가 출궁할 때에 연로(沿路) 각 고을의 다담을 모두 그만두라고 명하였다(『숙종실록』 43년 2월 12일). 한편 흉년이 들었을 때에는 다담과 아울러 유밀과도 금하였다(『영조실록』 31년 9월 14일).

중국 사신에게도 다담을 제공하는데 초상이 났을 때는 사양하였다. 1644년(인조 22) 접대도감이 호행장에게 하마연(下馬宴)을 청하였으나 중국 황제의 초상이 났기 때문에 다담례(茶啖禮)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참고문헌

  •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 김용숙, 『조선조 궁중풍속연구』, 일지사, 1987.
  • 한복진, 『조선시대 궁중의 식생활문화』, 서울대학교출판부, 2005.
  • 황혜성 외, 『李朝宮廷料理通攷』, 학총사, 1957.
  • 황혜성 외, 「궁중의 식생활」, 『한국음식대관』6권 , 한국문화재보호재단,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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