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침사(陵寢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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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과 왕비의 명복을 빌고 능역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사찰.

개설

능침사(陵寢寺)는 왕릉을 수호하기 위해 설치된 사찰이다. 능침사에는 선왕의 어영(御影)이나 위패를 모신 어실(御室)이 마련되었고, 조석 예불과 초하루, 보름, 추석, 청명, 한식, 단오, 기신(忌晨) 때마다 재가 치러졌다. 능에서 제사가 있을 때는 능침사에서 제수를 마련해 공급하였다. 명종대까지 대부분의 왕릉에는 능침사가 지정되었지만, 선조대 이후에는 더 이상 능침사가 설치되지 않게 되면서 조포사(造泡寺)가 그 기능을 대신하였다.

내용 및 특징

왕릉 근처에 사찰을 세워 능을 보호하게 하는 것은 중국에서부터 유래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능침사를 건립하였는데, 신라신문왕이 선왕인 문무왕의 묘를 감포 앞바다에 수중릉으로 세우고 그 인근에 창건한 감은사(感恩寺)가 대표적이다.

고려에서는 능침사의 기능이 훨씬 더 확대되어 진전사원의 형태로 설치되었다. 즉, 왕릉 주변에 사찰을 마련한 후 경내에 진전(眞殿)을 지어 왕의 초상화를 봉안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처럼 고려시대에는 사원 경내에 진전이 부속 건물로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반면 조선조에 이르면 사원이 진전의 부속적인 역할로 점차 바뀌게 되었다.

조선초인 태종대까지는 고려의 예를 따라 진전사원 형태의 능침사가 세워졌다. 능침사는 능의 묘역 안에 창건되었으며, 사찰에는 어실이 설치되었다. 또 국가에서는 능침사를 운영하기 위한 토지와 노비를 지급하였다. 이 시기에 설치된 능침사는 총 3개로 정릉의 흥천사, 제릉의 연경사, 건원릉의 개경사이다. 흥천사(興天寺)는 1396년(태조 5) 태조가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능침사로, 도성 안 정릉 바로 옆에 170여 칸이나 되는 대가람을 창건하였다. 정종은 자신의 생모인 신의왕후의 능인 제릉의 능침사로 연경사(衍慶寺)를 지정하면서, 이미 80여 명의 노비가 배속된 연경사에 추가로 20여 명을 내려주었고 토지 100결을 하사하였다. 태종은 아버지 태조가 죽자 능침사로 개경사(開慶寺)를 창건하였다.

태종은 부모인 태조와 신의왕후의 능에는 능침사를 설치하였지만, 자신이 죽은 후에는 절대로 능침사를 정하지 말 것을 세종에게 명하였다. 이에 세종대에는 태종의 유지에 따라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인 헌릉 경내에 능침사가 설치되지 않았다. 대신 헌릉에서 가까운 회암사를 헌릉의 능침사로 삼고 회암사 내에 태종의 어실을 마련하였다. 1549년(명종 4) "정인사(正因寺)는 덕종대왕(德宗大王)의 능침사(陵寢寺)이고 회암사(檜巖寺)는 태종대왕(太宗大王)의 능침사인데, 유생들이 난입하여 소란을 피운다면서 봉은(奉恩)·봉선(奉先) 두 사찰의 예와 같이 방(榜)을 걸어 금하라고 자전이 정원에 전교하였다."(『명종실록』 4년 9월 8일)는 기록이 있어 회암사가 헌릉의 능침사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세종대부터 능침사는 능역 밖에 설치되는 것이 관례가 되었고, 왕실 의례에서도 불교식 의례가 점차 배제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왕실 내에서는 불교 신앙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에, 세조대부터 명종대까지 호불 성향의 왕과 왕비들에 의해 성대한 규모로 능침사가 지어졌다.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인 광릉의 능침사인 봉선사와 세종과 소헌왕후의 능인 영릉의 능침사인 신륵사, 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인 선릉과 아들 중종의 능인 정릉이 위치한 선정릉의 능침사인 봉은사 등이 대대적으로 중창되었다.

이전의 능침사들이 능역 내에 신창된 것과 달리 봉선사와 신륵사, 봉은사 등은 왕릉의 묘역에서 일정 거리가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원래 있던 절을 수리해 능침사로 삼은 것이었다.

능침사는 왕릉을 수호하는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억불 정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특별한 보호를 받았다. 1483년(성종 14) 12월 도승지김여석은 세입 확대를 이유로 들며 능침사사(陵寢寺社)를 제외한 사찰의 땅은 모두 없애라고 건의하였으며(『성종실록』 14년 12월 19일), 1506년(중종 1) 중종은 수륙사(水陸社)와 능침사의 위전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찰의 위전은 모두 혁파하라고 하였다(『중종실록』 1년 10월 15일).

이처럼 능침사는 수륙사와 더불어 왕실에서 특별히 보호하는 사찰로 취급되었는데, 이는 능침사가 왕실의 불사를 담당하는 사찰이었을 뿐만 아니라 왕릉의 보호와 수리, 왕릉의 제수 공급 등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능침사는 왕의 위패를 모신 사찰이었으므로 능침사 경내에서는 유생들이 함부로 소란을 피울 수 없었고, 지방 관청 또한 능침사에 각종 잡역이나 잡세를 부과할 수 없었다. 능침사 입구에는 왕실에서 하마비를 설치해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능침사의 건물이 쇠락했을 때는 왕실에서 중창 비용을 지급하였다. 1552년(명종 7) 신의왕후의 능인 제릉(齊陵)의 능침사인 연경사(衍慶寺)와 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인 후릉(厚陵)의 능침사인 흥교사(興敎寺)를 수리하였으며, 1555년(명종 10)에는 능침사 승려들은 승군으로 차출되지 않도록 하였고 위세(位稅)를 지급해 주었다.

변천

선조대 이후부터 왕릉에는 더 이상 능침사가 설치되지 않았다. 후궁이나 공주 등의 원묘(園墓)를 수호하는 원당이 설치되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왕이나 왕비의 능에는 더 이상 능침사가 설치되지 않았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왕릉의 능침사 설치가 중단된 것은 선조대 이후 유교식 의례의 정착과 깊게 맞물려 있다. 선조대 이후 사림정치가 본격화되면서 왕실의 상장례는 모두 유교식으로 교체되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원묘제가 폐지되었는데, 국왕의 혈족을 추숭하기 위한 원묘제에 기반을 두고 있던 능침사는 더 이상 설치할 명분을 잃게 되었다.

이후 왕릉에는 능침사 대신 조포사(造泡寺)라 불리는 사찰이 지정되었다. 조포사는 ‘두부를 만드는 절’이라는 의미로, 조선후기에 이르러 왕실원당을 비하해서 부르는 용어로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조선전기 능침사에는 어실이 마련돼 왕의 어진이나 위패가 배치된 반면 조포사에는 어실이 설치되지 않았다. 따라서 왕을 위한 정기적인 재나 조석 예불이 치러지지 않았다. 대신 능에서 제사가 치러질 때마다 제수용품과 제물을 공급했으며, 왕릉 주변의 산림을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능침사의 본래 기능인 선왕의 추복 역할은 사라지고, 왕릉에 승려들의 노동력을 공급하는 기능만 남게 되면서 그 명칭 또한 조포사로 자연스럽게 변모되어 간 것이다.

참고문헌

  • 『묘전궁릉원묘조포사조(廟殿宮陵園墓造泡寺調)』
  • 장충식, 『한국불교미술연구』, 시공사, 2004.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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