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신도비(陵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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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陵)·원(園)·묘(墓)에 건립한 신도비(神道碑)와 표석(表石) 등의 비석.

개설

비(碑)는 관을 내리기 위해 광(壙) 주변에 세운 돌이나 나무로 된 지주(支柱)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처음에는 피장자를 밝히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지다가 그 의미가 확대되어 피장자의 업적을 찬양하는 문장을 지어 비석에 새기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증직을 포함하여 종2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고위 관료가 세울 수 있는 신도비와 대부(大夫)들이 세우는 묘갈(墓碣)이 있으며, 음기(陰記)가 있는 묘표, 단갈(短碣) 등이 있다. 왕릉에서는 초기에 신도비를 세우다가 폐지되고, 후기에는 표석을 세웠다.

내용 및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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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 왕릉인 제릉(齊陵), 건원릉(健元陵), 헌릉(獻陵), 영릉(英陵)에 세워진 신도비는 귀부(龜趺)·비신(碑身)·이수(螭首)로 이루어져 있으며, 귀부와 이수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조각품이다. 비신과 이수는 1개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비석받침인 귀부에 꽂는 형태이다. 4m에 이르는 장중한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비각(碑閣)을 건립하였다.

후기에 세워진 표석들은 부석(趺石)·비신(碑身)·개석(蓋石)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신도비의 귀부 대신에 방형의 비석받침을 사용하였으며, 비신은 화강암 종류인 애석(艾石)이나 오석(烏石)으로 제작되었다. 개석은 팔작지붕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윗부분에 얹어 비신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숙종대 이후 표석이 계속 세워지게 되자 정조는 『춘관통고』를 편찬하면서 표석 제작의 규례(規例)를 제시하였다. 비신을 받치는 부석(趺石)은 길이 4척 5촌 9푼, 폭 3척 5촌 2푼, 높이 2척 3촌 4푼의 직육면체의 상면 중앙을 파내 비석을 세운다. 비신은 전면(前面)에 능·원·묘의 명칭을 전서(篆書)로 쓰고, 음기에는 해서(楷書)로 피장자의 간략한 인적사항과 능·원·묘의 위치를 기록하였다. 글자가 파인 부분은 붉은색의 당주(唐朱)를 칠하였다. 비신의 규모는 높이 5척 4촌 5푼, 폭 2척 8푼, 두께 1척 2푼이다. 개석은 길이 4척 8푼, 폭 3척 2촌 6푼, 높이 1척 5촌 3푼으로 제시되었다. 부석 아래에는 전석(磚石)을 까는데, 길이 4척 7촌 9푼, 폭 3척 8촌 7푼, 높이 1척 5촌이다. 여러 능·원·묘에 조성된 비석의 실제 크기와 표기 방식은 『춘관통고』의 규정과 조금씩 차이가 있다. 비석은 비각을 설치하여 보호한다.

변천

조선초기에 조성된 왕릉에는 신도비를 세워 피장자의 업적을 찬양하는 문장을 빼곡하게 기록하였었다. 문종 서거 후 신도비 건립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왕의 업적은 국사(國史)에 기록되며, 문종의 재위기간이 짧아 내세울 업적이 없다는 이유로 세우지 않게 되었다. 그 후 왕릉에는 아무런 비석도 세워지지 않았다. 숙종 때에 이르러 왕릉의 수효가 많아져서 어느 왕을 모신 능인지를 명백하게 나타낼 필요가 생기자 신도비 대신 간략한 내용만을 기록한 표석(表石)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영조 때에는 비석을 세우지 않았던 전대(前代)의 모든 왕릉에 표석을 갖추었다.

의의

조선은 유교문화권에서도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비석을 세웠다. 특히 분묘문화가 발전하여 능·원·묘를 조성하면서 피장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비를 세우는 것이 하나의 문화로 발전하였다. 왕실에서 세운 비석은 당대를 대표하는 명문장가와 서예가의 글씨로 되어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크기 때문에 금석학이나 서예사 분야에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

  • 『임하필기(林下筆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