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양춘(洛陽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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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송나라에서 들어온 사악(詞樂)의 하나.

개설

「낙양춘(洛陽春)」은 송나라의 구양수가 지은 산사(散詞)이며, 11~12세기에 고려에 전해졌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우방(右坊)에서 당악(唐樂)으로 연주되었으며, 『속악원보』에 그 악보가 전한다.

내용 및 특징

『고려사』「악지」에 전하는 송나라의 사악 중 산사는 가무희에 편입되어 노래로 불린 것이 아니라 관현악 반주에 한시를 노래하는 성악곡이었다. 사(詞)음악은 각 시구의 길이가 불규칙하기 때문에 「장단시(長短詩)」라고도 하며, 미전사(尾前詞)와 미후사(尾後詞)로 이루어져 있다. 「낙양춘」의 시 역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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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춘」의 시를 보면, 미전사와 미후사 모두 1구와 3구는 일곱 글자로 구성되었고, 2구는 다섯 글자, 4구는 여섯 글자로 글자 수에 규칙성이 없으나, 음악적으로 볼 때 4글자마다 박이 규칙적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에, 8박으로 구성된 시 1행의 음악은 일정한 길이로 연주되었다. 따라서 8박의 틀 안에 모자라는 글자는 음을 다음 박까지 길게 끌어 노래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보허자(步虛子)」와 달리 별다른 향악화 과정을 거치지 않았으며, 가사 없이 관현악곡으로 연주되었다.

조선시대에 조회와 연향에서 사용된 「낙양춘」의 악기 편성을 살펴보면, 우선 그 곡이 당악이기 때문에 주선율은 당피리가 담당하며, 편종·편경·대금·당적·해금·아쟁·좌고·장고로 편성되므로, 황종의 음고는 향악의 것과 달리 C음에 가깝다. 『속악원보』 권4에 실려 있는 「낙양춘」 악보를 살펴보면, 그 음계는 황종·태주·협종·중려·임종·남려·응종의 7음계이며, 협종(仲→夾)과 응종음(南→應)은 한 번씩만 출현한다. 협종과 응종음을 빼면 황종-태주-중려-임종-남려의 5음음계 황종 평조로 보이나, 한번이라도 출현하는 협종음과 응종음으로 인해 당악적인 맛을 느끼게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의 「낙양춘」은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중국 사신을 위한 잔치에서 사용된 경우이다. “지금부터 중국 사신에게 위로연[慰宴]을 베풀 때에 정재(呈才)가 없고 술만 마실 때는, 「낙양춘」·「환궁악(還宮樂)」·「감군은(感君恩)」·「만전춘(滿殿春)」·「납씨가(納氏歌)」 등의 곡조(曲調)를 서로 틈틈이 바꿔가면서 연주하도록 하라.”고 한 것처럼(『세종실록』 24년 2월 22일) 조선에 온 중국 사신을 위로하기 위해 중국 스타일의 음악을 연주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하나는 고취악으로 사용한 것이다. 고취악으로 사용된 「낙양춘」은 조회와 연향에서 보인다. 조회에서 사용한 경우는, 세자가 조참을 받을 경우이다. 즉, 세자가 출궁할 때에는 당악인 「오운개서조(五雲開瑞朝)」의 미후사 부분만을 연주하고(『세종실록』 27년 2월 2일), 신하들이 배례할 때에는 당악 「수룡음(水龍吟)」을 연주하며, 입궁할 때에 당악 「낙양춘」을 연주하게 하였다. 또한 악기는 방향(方響) 2, 당비파(唐琵琶) 4, 퉁소(洞簫)·아쟁(牙箏)·대쟁(大箏) 등이 각각 2, 피리[觱篥]가 4, 당적(唐笛) 2, 대금(大芩) 2, 장고(杖鼓) 4, 북[鼓] 1이며, 악공의 수는 악기의 수에 따라 25인이 배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악대의 수는 조선후기에 조금 변화가 있었다. 즉, 순조대의 기록에는 방향·당비파·퉁소·아쟁이 각 2, 피리 4, 당적 2, 대금 2, 장고 4, 북 1로 당비파의 수가 반으로 줄고, 대쟁이 빠진 21개의 악기로 연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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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와 평가

「낙양춘」은 고려시대에 들어온 중국의 사악 중 하나이며, 「보허자」가 향악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조선식으로 변한 것과는 달리 「낙양춘」은 향악화되지 않은 채 연주되는 당악이다. 또한 정작 중국에서는 사악이 문헌으로만 존재하는 데 비해, 조선에서는 연주되었던 음악의 실체를 악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기에 그 의의는 더욱 크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속악원보(俗樂源譜)』
  • 송방송, 『증보 한국음악통사』, 민속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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