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선(羅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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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러시아를 지칭하던 용어.

개설

1654년(효종 5) 청나라가 흑룡강과 송화강 일대에 출몰하는 러시아 세력을 막기 위하여 군사 원정을 준비하면서 조선에도 파병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보낸 문서에 처음으로 나선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였다. 당시 조선 조정과 청의 사신은 나선을 영고탑 부근에 사는 별종(別種)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청 조정에서도 나선의 실체에 대하여 정확히 모르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조선은 두 차례에 걸쳐 소규모 병력을 파견해 청나라 군대의 지휘를 받아 전투에 임하였는데, 한국사에서는 이 군사 원정을 나선정벌이라고 일컬었다. 1654년의 1차 원정에서는 송화강 일대에서 전투를 벌여 러시아 세력을 흑룡강 쪽으로 축출하였으며, 1658년의 2차 원정 때에는 흑룡강에서 전투를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로 러시아는 송화강을 따라 남하하지 못하였다. 개항 이후에는 러시아를 가리키는 말이 나선에서 아국(俄國)이나 아라사(俄羅斯)로 바뀌었다.

내용 및 특징

전근대 동아시아 지역에서 러시아를 가리키는 여러가지 한자 음역이 있었는데, 청나라에서는 나찰(羅刹)이, 조선에서는 나선(羅禪)이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1654년(효종 5)에 청이 나선 원정을 감행하면서 조선에 파병을 요구해 온 것을 계기로 이른바 ‘나선정벌’에 나서면서 그 존재가 조선에 비로소 알려졌다. ‘나선정벌’이란 17세기 중반에 북만주로 남하하던 러시아코사크(Cossack)를 저지하려던 청나라의 파병 요구에 따라 조선군이 마지못해 송화강과 흑룡강 유역으로 두 차례 출정한 사건으로 정의할 수 있다.

러시아가 16세기 후반에 우랄산맥을 넘어 동진(東進)을 시작한 요인들 가운데(중) 하나는 모피 무역이었다. 코사크인을 앞세운 러시아의 동진은 그 속도가 매우 빨라, 우랄산맥을 처음으로 넘은 1581년 이후 식민도시를 건설하며 계속 동진해, 1646년에는 이미 흑룡강 탐사를 마쳤으며, 1647년에는 오호츠크(Okhotsk)항을 건설하였다. 이후 흑룡강을 따라 종횡무진하며 1651년에는 강 상류에 알바진(Albazin) 요새를, 1652년에는 강 중류에 하바롭스크(Khabarovsk) 요새를 건설하였다. 흑룡강의 지류인 송화강을 거슬러 남하해 만주 일대를 압박함에 따라, 청과의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1652년에 우찰라([烏札拉], Acharsk) 전투에서 대패한 청은 재차 출정을 준비하면서 화력을 보강하기 위하여 1654년(효종 5) 2월에 조선에 총수병(銃手兵)의 파병을 요구하였다.

이에 북우후(北虞候)변급(邊岌)이 이끄는 152명 규모의 원정군이 4월 초에 영고탑에서 청군에 합류하여 그 지휘를 받았다. 약 1,000여 명의 연합군은 회통강(會通江, 목단강의 하류)과 후통강(後通江, 송화강의 다른 이름)의 합류 지점에 위치한 왈합(曰哈)이라는 곳에서 약 400명의 러시아군과 맞닥뜨려 바로 교전에 들어갔다. 탄약과 식량의 부족으로 러시아군이 흑룡강으로 도주하자 연합군은 추격을 멈추고 6월 초에 영고탑으로 귀환하였고, 조선군도 84일간의 원정을 마치고 1명의 전사자도 없이 모두 회령으로 귀환하였다.

이 1차 원정은 송화강을 따라 남하하던 러시아 세력을 일단 저지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으나, 결정적 승리는 아니었다. 러시아군의 병력 손실도 그리 크지 않아, 러시아군은 이후에도 여전히 흑룡강을 오르내리며 세력을 과시하였다. 이후 1655년 봄에 러시아군에게 한 차례 더 패한 청나라는 새로운 원정을 준비하면서 1658년 2월에 조선에 재차 파병을 요구해 왔다.

이에 혜산진첨사(惠山鎭僉使)신유(申瀏)가 이끄는 261명의 병력이 출정해 5월 초에 영고탑에서 청군의 지휘를 받았다. 약 2,500명 규모의 연합군은 송화강과 흑룡강이 만나는 부근에서 스테파노프(Stepanov)가 이끄는 360명 규모의 러시아군과 교전을 벌였다. 주야로 계속된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러시아 선박 11척 중 7척을 불태우고 3척을 나포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러시아군은 360명 가운데 지휘관 스테파노프를 포함해 220여 명이 전사하였고, 1척의 배를 타고 도주한 인원은 95명이었으며, 나머지는 실종되었다. 연합군 피해는 조선군 전사 8명 포함하여 전사 120여 명, 조선군 부상자 25명 포함하여 부상자 230여 명이었다. 조선군은 8월 하순에 회령으로 귀환하였다.

변천

북벌(北伐) 논의가 있던 효종대와 현종대에는 나선정벌에 대하여 조정과 민간에서 모두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북벌의 대상은 청인데, 그 청을 치기는커녕 오히려 그 지휘를 받아 작전에 임한 데서 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북벌 담론이 사실상 그 시의성을 상실한 뒤인 1690년대부터 나선정벌을 보는 조선인의 시각은 보다 긍정적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청의 요구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출병한 부분은 최대한 은폐하고, 조선이 조선의 필요에 따라 출정하여 오랑캐를 물리쳤다는 식으로 나선정벌을 재해석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기억의 전환’은 숙종이 처음 시작하였으며, 이후 이익(李瀷)과 이규경(李圭景) 등에 의하여 확대 재생산되었다. 이런 추세에 따라 나선정벌은 민간의 영웅소설 소재로도 널리 쓰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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