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金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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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28년(세종 10)=?]. 조선 초 태종(太宗)~세종(世宗)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집현전(集賢殿)직제학(直提學) 등을 지냈다. 본관은 언양(彦陽)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밀직사(密直司) 동지사(同知事)를 역임하고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봉해진 김수익(金受益)이고 어머니 정씨(鄭氏)는 정홍의(鄭弘義)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고려에서 김해부사(金海府使)를 지낸 김가기(金可器)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찬성사(贊成事)와 좌승상(左丞相) 등을 역임한 김륜(金倫)이다.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로서 태종과 세종을 오랫동안 보좌해 깊은 신임을 받았다.

태종~세종 시대 활동

1408년(태종 8) 과거에 합격해 관직에 진출하여, 한동안 승정원 주서(注書)로 태종을 보좌했다.(『태종실록』 8년 3월 12일) 1412년(태종 12)에는 태종의 명을 받아 환관 노희봉(盧希鳳)과 함께 풍해도의 농작물 실손 현황을 조사했다.(『태종실록』 12년 8월 10일) 이후 이조 정랑(正郞)으로 자리를 옮겼고, 1416년(태종 16) 현직 관리를 대상으로 하는 중시(重試) 문과에 1등으로 급제하여 직예문관(直藝文館)에 임명되었다.(『태종실록』 16년 8월 17일) 그로부터 1년 후에 사헌부 장령이 되었는데, 이때 금주 기간에 사헌부 감찰방(監察房)에 기생을 불러 술을 마신 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았지만 처벌받지 않았다.(『태종실록』 17년 8월 13일)

세종이 즉위한지 2년이 지난 1420년(세종 2) 김자는 집현전 직제학에 제수되었다.(『세종실록』 2년 3월 16일) 또한 같이 집현전 직제학에 임명된 신장(申檣)과 함께 당시 세자인 문종(文宗)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우보덕(右輔德)을 겸임했다.(『세종실록』 3년 10월 26일) 다음해인 1422년(세종 4)에 훗날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개칭되는 동부대언(同副代言)에 임명되어 세종을 보좌하게 되었다.(『세종실록』 4년 12월 13일) 세종을 대신해 전교를 조정에 전하고, 명(明)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것이 김자의 주된 역할이었다. 그는 이때도 만취하여 궐에 들어온 소(疏)를 받지 못하는 실수를 저질러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처벌받지 않았다.(『세종실록』 6년 10월 4일) 1년 후 좌부대언(左副代言)에 제수되어 계속해서 세종을 보좌했는데, 이때 심한 부패를 저질러 귀양 중이던 조말생(趙末生)에 대한 대간의 엄벌 요구에 찬성하는 등 정치적 사안에도 목소리를 냈다.(『세종실록』 8년 5월 27일)

이후에도 김자는 우대언(右代言)과 좌대언(左代言)으로 잇따라 승진하며 계속해서 세종 곁에 머물렀다. 특히 명나라 사신의 까다로운 요구에 응대해 그 조정을 위해 노력했다.(『세종실록』 10년 9월 23일) 그 외에도 유학(儒學), 형제(刑制), 인사(人事) 등 다방면에 걸쳐 세종에게 조언을 하다가, 좌대언으로 근무하던 1428년(세종 10)에 병사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세종이 쌀 20석과 콩 10석, 종이 1백 권, 관곽(棺槨)을 보내는 동시에 예조에 치제(致祭)할 것을 명하였다.(『세종실록』 10년 12월 28일)

성품과 일화

김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격이 밝고 민첩했으며, 도량이 깊고 업무에 통달하였다. 그리하여 세종이 곁에 두고 자신의 말을 대신하게 했으나 갑자기 병사하여 아쉬움이 컸다.(『세종실록』 11년 1월 25일) 김자는 관직 생활 대부분을 승정원 승지로 근무하며 임금을 보좌했다. 그리하여 김자에 대한 태종과 세종의 신임 또한 깊어 그가 일으킨 크고 작은 사건들이 대부분 불문에 부쳐졌다.

특히 김자는 동료들과 술을 심하게 마시고 실수를 저지르는 일이 많아 대간으로부터 여러 번 탄핵 받았다. 태종 대 직예문관 시절에는 사헌부 감찰방에 기생을 불러 대간들과 술을 마신 것이 알려져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태종에 의해 불문에 부쳐졌다.(『태종실록』 17년 8월 10일) 세종 대에 동부대언으로 근무할 때는 다른 대언(代言)들과 술을 마시느라 사헌부 장령양활(梁活)을 맞이하지 않아, 사헌부에서 김자에게 벌을 내릴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세종실록』 6년 10월 4일)

성격 또한 강하여서 호걸이던 김자는 1416년(태종 16) 중시 문과 때 한미한 가문 출신인 병조 정랑양여공(梁汝恭)의 시험지를 빼앗아 자신의 이름을 써 냄으로써 장원에 올랐다는 야사가 전해지기도 한다.[『용재총화(慵齋叢話)』 권9 ] 또한 우대언 시절에 사헌부 장령양활과 궐내에서 서열 다툼을 벌여 세종이 이를 직접 중재하기도 했다.(『세종실록』 9년 6월 1일)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방목(榜目)』
  • 『용재총화(慵齋叢話)』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