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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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고종 때 경기도·황해도·충청도 지방의 연해를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군영.

개설

친군기연해방영(親軍畿沿海防營)·해방영(海防營)·해방아문(海防衙門)이라고도 한다. 기연해방영은 1883년 12월 경기도 연안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이후 황해도·충청도 지방의 수군을 관할하게 되었다. 갑신정변 후 본부가 부평에서 한양으로 옮겨지고 친군기연해방영으로 개편되었다. 국왕 호위까지 담당하는 중앙군으로 변모하면서 본래의 해안 방어 기능을 상실하고, 1888년 4월 군제 개편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기연해방영은 1883년(고종 20) 12월 5일 총관기연해방사무(摠管畿沿海防事務)에 민영목(閔泳穆)을 임명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신설했으며, 1884년 1월 4일 부평부에 본부를 두고 공식 출범했다(『고종실록』21년 1월 4일).

기연해방영은 경기도 연안 일대의 해안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베트남을 둘러싼 청불전쟁(淸佛戰爭)에 대비한 청나라의 전략과 군권(軍權)을 장악하려는 외무독판민영목의 정치적 계산이 반영되어 있었다. 초기에는 육군만으로 구성되어 해안 방어 목적과는 거리가 있었다.

조직 및 역할

조직과 인원은 변동이 있었으나, 1884년 「기연해방영계하사목(畿沿海防營啓下事目)」에 의하면, 총관(總管) 1명, 부총(副總) 1명, 육군별장(陸軍別將) 1명, 수군별장(水軍別將) 1명, 군사마(軍司馬) 2명, 좌교위(左校尉) 1명, 우교위(右校尉) 1명, 군위(軍尉) 8명, 군의(軍醫) 1명, 별군관(別軍官) 3명, 교련관(敎鍊官) 10명, 정병(正兵) 696명, 화병(伙兵) 32명, 장부(長夫) 30명, 서리 3명 등 총 873명이다.

기연해방영은 본래 경기도 연해를 비롯하여 황해도·충청도 해안을 수비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갑신정변 후에는 본부를 한양으로 옮기고 국왕이 대궐 밖으로 거둥할 때 호위군의 역할도 담당했다.

변천

1884년 4월 21일 총관기연해방사무민영목이 경기 연안의 해안 방어책을 제시하여 국왕의 허락을 받았다(『고종실록』21년 4월 21일). 이어 기연해방사목(畿沿海防事目)을 제정했는데, 명칭은 기연해방(畿沿海防)으로 정하고, 품계는 1품 아문으로 하였다. 관할 구역은 수원·인천·김포 등 경기 연안을 중심으로 황해도[海西]·충청도[湖西] 수군까지 포함시켰으며, 군대는 육군과 수군으로 편성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무렵 총관기연해방사무 민영목은 병조 판서와 독판교섭통상사무를 겸함으로써 군사권과 더불어 외교 분야에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었으며, 8월 27일 해방총관(海防總管)이 강화유수를 겸임하게 되자 그 권한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민영목은 1884년 10월의 갑신정변 때 개화파에게 살해되었다.

갑신정변 후 해방사무총판에는 이규원(李奎遠)이 임명되었으며, 1885년 이후에는 이봉구(李鳳九)·김선근(金善根)·민영환(閔泳煥)·김기석(金箕錫)·민영익(閔泳翊) 등이 임명되어 활동했다. 원래 부평부에 있던 기연해방영의 본부는 1885년 3월 한양의 용산방 만리창 기지로 옮겼다가 1886년 2월 남별영(南別營)으로 이동하였다.

기연해방영은 1886년 3월 6일 그 이름을 친군기연해방영으로 바꾸었으며, 총관기연해방사무는 기연해방사로 하고, 총융사(總戎使)를 본떠 체제를 재정비하도록 했다 (『고종실록』23년 3월 6일). 이후 친군기연해방영은 융무당(隆武堂)에 나가 왕세자 앞에서 조련하기도 했으며, 임금이 외출할 때 어가를 시위함으로써 호위군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888년 4월에 군제가 변경되면서 친군기연해방영은 우영(右營)·후영(後營)과 함께 통위영(統衛營)으로 통합·재편됨으로써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배항섭, 『19세기 조선의 군사제도 연구』, 국학자료원, 2002.
  • 최병옥, 『개화기의 군사정책연구』, 경인문화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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