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림사(祇林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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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 국가에서 공인한 36사(寺) 가운데 하나로, 경주토함산에 있는 절.

개설

기림사(祇林寺)는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토함산에 있는 절로, 임정사(林井寺)라고도 불렸다. 늦어도 삼국통일기에는 절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선종에 속한 사찰이었다. 조선 세종대에 선교양종으로 나누고 각각 18사씩만을 공인했을 때, 기림사는 선종 사찰로 공인받았다. 사찰에 많은 문화재가 전한다.

내용 및 변천

(1) 조선시대 이전의 기림사

643년(신라 선덕여왕 12)에 천축국 즉 인도 승려 광유(光有)가 창건하여 임정사라 불렀고, 원효(元曉)가 중창하면서 기림사로 이름을 바꿨다고 전하나 분명치 않다. 기림사라는 이름은 석가가 생존했을 당시 인도 코살라국의 수도 사위성(舍衛城) 근처에 제타태자(祗陀太子)가 석가모니를 위해 조성한 기원정사(祇園精舍)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682년(신라 신문왕 2) 감은사(感恩寺)에 행차했던 신문왕이 돌아오는 길에 기림사 서쪽 시냇가에서 점심을 먹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늦어도 통일신라기에는 사격(寺格)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해 고려 고종대에는 선종 승려인 각유(覺猷)가 주석하고 있었음이 확인되므로, 기림사는 선종 사찰이었음도 알 수 있다. 이는 세종대 조선 불교를 선교양종으로 나눌 당시 기림사가 선종 18사에 속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2) 조선시대의 기림사

기림사는 조선전기 국가 공인 사찰이 되었는데, 1424년(세종 6) 3월 세종은 유명무실해진 각 관(官)의 자복사를 모두 폐지하였고, 다음 달 기존의 7개 종파를 선교양종으로 통폐합하고, 각각 18개씩 총 36개의 사찰만을 공인하였다. 이때 기림사는 선종 사찰로 공인되었는데, 원속전이 100결이었고, 여기에 50결을 더 내려주어 150결의 전지가 있었으며, 절에 거주하는 승려는 70명이었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그러나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전지 130결을 주었다고 하여[『세종실록』 지리지 경상도 경주부], 앞의 150결과는 차이가 있다.

1501년(연산군 7) 건칠보살좌상(乾漆菩薩坐像, 보물 제415호)이 조성되고, 임진왜란 때에는 경주 지역 의승 활동의 중심 사찰이 되기도 하였다. 17~18세기에 여러 차례의 중수 공사가 진행되었으며, 1817년(순조 17) 초의의순(草衣意恂)이 기림사에서 나는 옥돌로 천불(千佛)을 조성하여 해남대흥사 천불전에 봉안하였다. 1862년(철종 13) 대화재로 사찰이 소실되었으나 이듬해 다시 중건하였다. 그리고 1868(고종 5)에는 경주 남산 용상사지(茸長寺址)에 있던 김시습(金時習)의 사당을 기림사로 이전하였다.

조선시대 기림사에는 대적광전(大寂光殿)을 금당으로 하여 약사전(藥師殿),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정광여래사리각(錠光如來舍利閣)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는 31본산 중 하나로 지정되어 경주 일대의 사찰을 말사로 거느렸고,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佛國寺)의 말사이다.

(3) 소장 문화재

소조비로자나삼존불상(보물 제958호), 조선시대 조성된 소조비로자나불상의 불복장(佛腹藏) 일괄(보물 제959호), 비로자나삼불회도(毘盧遮那三佛會圖, 보물 제1611호), 약사삼존상, 사천왕상, 사라수왕(沙羅樹王) 탱화, 목탑지, 치미, 역대 왕의 어필(御筆), 경상도와 경주 지역의 지방 제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인 『부호장선생안(府戶長先生案)』·『동도역세제자기(東都歷世諸子記)』·『경상도영주제명기(慶尙道營主題名記)』 등이 전하고 있어, 기림사가 신라시대부터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경주 지역의 중요한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三國遺事)』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곽동석, 『금동불』, 예경, 2000.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이정, 『한국불교사찰사전』, 불교시대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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