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주사(歸州寺)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태조이성계의 원당으로, 함흥시설봉산에 있는 절.

개설

귀주사(歸州寺)는 고려 문종대 붕현 선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조선 태조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독서한 적이 있으며 왕위를 물려주고 태상왕이 된 이후에도 머물렀던 사찰이다. 이후 왕들은 귀주사를 태조의 원당으로서 존중하였으며, 중수할 때마다 비용을 지원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30본산의 하나로 선정되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함경남도 함흥시설봉산에 소재한 귀주사는 고려 문종 때 붕현(鵬顯) 선사(禪師)가 창건한 사찰로 전해지며, 원래 이름은 정수사(淨水寺)였으나 태조이성계가 귀주사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외의 기록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고려시대 정수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1932년에 찬술한 권상로의 「조선불교양종대본산함경남도함주군설봉산귀주사중창사적비명병서(朝鮮佛敎兩宗大本山咸鏡南道咸州郡雪峰山歸州寺重創事蹟碑銘幷序)」에 따르면, 붕현 선사는 호(號)가 흑도인(黑道人)이고 성(姓)이 귀씨(貴氏)였다고 한다. 붕현이 어디서 출가하고 누구에게 수학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고 단지 흑도인이라고 불렸다는 것으로 볼 때, 동진의 칠도인(漆道人)이나 신라의 묵호자(墨胡子)와 같이 외국에서 온 승려가 아닐까 추정된다. 선사는 설봉산 석용봉(石茸峯) 아래에 작은 암자를 짓고 정수사라고 이름 붙이고 주석하면서 사람들을 지도하였는데, 이르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정도로 덕(德)이 깊고 도(道)가 높았다고 한다.

(2) 고려말~조선전기

정수사와 관련한 기록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이다. 태조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정수사에서 독서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독서했던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귀주사에 독서당(讀書堂)이 조선후기까지 존재하였고 역대 왕들도 성지(聖址)로서 존중하였던 것을 보면 단순한 설화로 보기 어렵다. 그런데 이성계가 정수사의 명칭을 귀주사로 바꾸고 가람을 중수했던 시기는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태상왕이 되었던 1401년(태종 1)이다. 이때는 이성계가 함경도 지역에 머물며 아들 태종의 환궁 요청을 거절하던 시기이다(『태종실록』 1년 4월 16일). 1402년(태조 2) 11월에 태상왕 이성계가 귀주사가 있는 함주로 향하자 태종은 무학 대사를 보내 태상왕의 환궁을 설득하기도 하였다(『태종실록』 2년 11월 9일). 이러한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이성계가 귀주사로 절 이름을 바꾼 시기가 왕위에 오르기 전이라기보다 태상왕으로서 귀주사를 방문했던 시기일 가능성이 높다. 이성계는 정수사를 귀주사로 개칭하고 사찰을 중수하여 관북 지방의 대가람으로 만들었다. 이후 조선 왕실은 대대로 귀주사에 대해 각종 세금을 감면하는 등 태조의 원당(願堂)으로서 존중하였다.

(3) 조선후기~일제강점기

조선후기 귀주사에 태조의 어필(御筆)을 모신 어필각(御筆閣)과 태조가 독서했던 독서당이 있었기 때문에 숙종과 정조가 어필을 하사하여 귀주사를 매우 존중하였으며 조선말기까지 왕실원당으로 인식되었다. 1716년(숙종 42)에 덕순(德淳) 선사가 전각과 낭무(廊廡)를 비롯하여 불상 및 각종 불기(佛器)들을 보수하는 등 절을 중수할 때 독서당도 중건하였는데, 숙종이 관리에게 명하여 각종의 도구와 금품을 보내 중건을 돕게 하였고, 이곳을 독서성지(讀書聖址)라고 불렀다. 그리고 정조는 귀주사에는 태조의 성적(聖蹟)이 있고 어필이 있으므로 지방 관리들에게 잘 보호하도록 당부하고, 독서당의 도형(圖形)을 그려서 올려보내라고 분부하였다.

조선말기까지 왕실에서 귀주사를 존중했던 사례는 고종대에 화재로 사찰이 소실되었을 때 왕실이 비용을 마련하여 적극적으로 복구했던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78년(고종 15)에 절에 화재가 일어 대부분의 건물이 전소되었으나 독서당과 어필각만이 다행히 화재를 면했다. 이듬해인 1879년 고종이 명을 내려 절을 중건하게 하였다(『고종실록』 16년 2월 28일). 당시 왕실에서는 왕의 사유재산이었던 내탕전(內帑錢) 3,500민(緡)과 공명첩(功名帖) 500장을 내려 사찰을 복구하도록 하였고, 쌍운(雙運) 선사가 공사를 지휘하여 15개월 만에 절을 복구하였다. 이때 300여칸에 달하는 대규모의 선원도 새로 지었다.

일제에 의해 국권을 박탈당했던 1911년에 조선총독부는 전국에 30본산을 발표하였는데, 이때 귀주사가 30본산의 하나로 지정되어 함경도의 여러 사찰을 관할하였다. 그 후 1922년 10월 5일에 또다시 귀주사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독서당을 제외한 전각과 당우 등이 모두 불에 탔다. 이때 귀주사는 본사 소유의 토지를 매각하고 말사의 전지에서 산출되는 수익금을 4년치를 확보하여 복구 비용을 마련하였으며, 또 각지에서 기부금을 모아 1924년 봄부터 공사를 시작하였다.

먼저 대웅전을 짓고 삼성각과 무량수각을 차례로 조성하였으며 1925년에는 해월루(海月樓)와 종무소 등을 완공하여 모두 70칸의 건물을 근대적 건축 양식으로 지었다고 한다. 1940년경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조선사찰귀중재산목록』에 의하면, 당시 귀주사의 재산 목록에는 태조 친필을 비롯하여 독서당도(讀書堂圖)와 사찰 중수와 관련한 조성일기(造成日記) 등이 기재되어 있다.

참고문헌

  • 權相老, 『韓國寺刹全書』, 東國大學校出版部, 1979.
  • 사찰문화연구원 편저, 『북한사찰연구』, 한국불교종단협의회, 1993.
  • 朝鮮總督府, 『(增補校正)朝鮮寺刹史料』下, 경성인쇄소, 1911.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