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협(權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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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3년(명종8)∼1618년(광해군10) = 66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사성(思省)이고, 호는 석당(石塘)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인데, 서울에서 거주하였다.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권상(權常)의 아들이며, 중추부 지사권황(權愰)과 도승지권희(權憘)의 아우이고, 권대임(權大任) · 권대운(權大運)의 조부이다. 나운걸(羅云傑)의 외손자이고, 최말(崔沫)의 사위이다.

선조 시대의 활동

1577년(선조10) 알성 문과에 급제하여,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성균관은 직강(直講) · 사예(司藝)를, 낭관(郎官)은 호조 · 예조 · 병조 · 형조의 정랑(正郞)을, 춘방(春坊)은 필선(弼善) · 겸필선(兼弼善)을, 사간원은 정언(正言) · 헌납(獻納)을, 사헌부는 장령(掌令) · 집의(執義)를, 홍문관은 교리(校理) · 응교(應敎)를 두루 역임하였는데, 항상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또 전조(銓曹)의 낭관(郎官)도 여러 번 지내면서 관리를 선임하였다. 이처럼 그가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 것은 그의 형 권황(權愰)권희(權憘)가 조정의 요직에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 후기 외직으로 황해도관찰사 ·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나갔다가, 승정원(承政院)으로 들어와서 1602년(선조35)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이르렀으나, 형처럼 도승지에 오르지는 못하였다. 형조 참의 ·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1605년(선조38) 대사헌이 되었다.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갔다가 1607년(선조40) 예조 판서가 되어 선조의 상례(喪禮)를 주관하였다.

중국 명나라와 외교 활동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조선은 명나라의 파병을 다시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1599년(선조30) 그는 명(明)나라에 가서 조선의 위급한 상황을 알리고 구원병(救援兵)을 요청하는 ‘청병 고급사(請兵告急使)’에 임명되었다. 그는 단숨에 중국으로 달려가서, 명나라 병부(兵部)에 대규모 원병을 요청하였다. 명나라 병부 시랑(侍郞)이정(李楨)이 조선의 지세를 알고자 하므로, 그가 산천의 형세와 원근을 도면에 그려서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가 눈물을 흘리면서 명나라 요로에 파병을 요청한 결과 명나라 신종(神宗) 황제의 허락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명나라는 약 20만 명 규모의 육군과 수군을 조선에 파병하였다. 1604년(선조37) 전쟁이 끝나고 선무공신(宣武功臣)을 선정할 때, 선조가 특별히 권협의 공훈을 정훈(正勳)으로 책록하게 하고, 1605년(선조38) 그를 길창군(吉昌君)에 봉하였다.

그 뒤 1616년(광해군8) 사은사(謝恩使) 정사(正使)가 되어 중국에 다녀왔는데, 엄동설한(嚴冬雪寒)의 겨울철에 노구(老軀)를 이끌고 5천 리의 여정(旅程)을 무리하게 왕래하다가 병을 얻어서, 1618년(광해군10)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저서로는 『연행록(燕行錄)』이 있다.

무덤과 비문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묘소는 경기도 부평(富平) 수탄리(水呑里)에 있고, 조경(趙絅)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행록(燕行錄)』
  • 『오봉집(五峯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서애집(西厓集)』
  • 『용주유고(龍洲遺稿)』
  • 『미수기언(眉叟記言)』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율곡전서(栗谷全書)』
  • 『상촌집(象村集)』
  • 『백헌집(白軒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