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방면세(宮房免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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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왕실과 왕족의 생계와 품위 유지를 위해 국가에서 소유권이나 수조권을 지급한 면세전답.

개설

궁방전은 17세기 이후 임금이나 궁중에서 사여(賜與)·절수(折受) 등의 방법으로 왕실 구성원에게 제공된 토지였다. 또한 토지대장인 양안(量案)이나 수조안(收租案)에 등재되어 국가에 대해 면세·면역의 혜택을 부여받았다. 궁방전을 확보하는 주된 방식인 절수는 조선전기 직전제의 계통을 잇는 것이었다. 이는 수조권적 토지지배가 폐지되고 소유권에 입각한 지주전호제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왕실이나 궁방의 과도기적 토지지배 방식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내용·특징 및 변천

17세기 이후 궁방전은 양안상 소유자가 없는 진황지(陳荒地)나 양안에 등재되어 있지 않은 가경지(可耕地)를 사여하거나 절수하는 방식으로 확대되었다. 이렇게 받은 궁방전은 양안이나 수조안에 등재되어 원칙적으로 국가에 대해 면세·면역의 혜택을 부여받았다. 특히 절수는 궁방전을 확보하는 주된 방식이었다. 이는 조선전기 직전제의 계통을 잇는 것으로 수조권적 토지지배가 폐지되고 소유권에 입각한 지주전호제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왕실이나 궁방의 과도기적 토지지배 방식이었다. 궁방에서는 면세·면역의 혜택을 미끼로 민전을 끌어들였으며 민인들도 이에 유인되어 자신의 땅을 궁방에 투탁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궁방은 권력을 배경으로 광범위한 민전침탈(民田侵奪)을 자행하였다.

17세기 초에 많아야 수백 결 정도라던 궁방 면세지는 17세기 후반에 접어들면 1,400결에 달할 정도로 확대되고 있었다. 궁방전의 확대는 국가 재정 수입의 감소와 직결되었다. 인조·효종 연간에는 궁방전에 과세하거나 면세를 금지하는 대신 재정을 지원하는 안, 그리고 면세결을 전체적으로 제한하는 방식 등 대책을 마련하였다. 이와 같은 대책은 효종·현종 연간을 거쳐 숙종대에 접어들면서부터 가시화되었다. 1695년(숙종 21) ‘을해정식(乙亥定式)’은 그러한 논의의 마무리였다(『숙종실록』 21년 7월 23일) (『숙종실록』 21년 7월 28일) (『숙종실록』 21년 8월 3일)

을해정식으로 절수는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고 이제 각 궁방은 매입을 통해 토지를 확보해야만 하였다. 아울러 민결면세제(民結免稅制)가 시행되어, 궁방은 소유권과 무관한(관계가 없는) 민전에 호조수세분(戶曹收稅分)만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절수지의 규모를 대략 200결 단위로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여 궁방전의 확대와 이후 궁방재정 통제의 근거로 삼고자 하였다.

18세기 궁방전은 매득지·절수지·민결면세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매득지는 소유권이 궁방에 있었으며 소유 구조·지대량은 일반 민전과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절수지의 구조는 복잡하였다. 개간지를 절수하였거나 궁방전 조성 과정에 민인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을 경우 궁방의 명목적 소유와 개간자의 실제 소유가 중첩된 중층적 소유 구조가 형성되었다. 지대액도 매득지와 달리 일정한 타협선상에서 책정되었다. 이 가운데 조 200두형은 궁방과 개간자 간 타협의 소산으로, 조 100두는 토세조(土稅條)로 지대의 성격을 가졌고 나머지 조 100두는 면세조(免稅條)로 국가에서 받아들이는 전결세(田結稅)의 총량에 해당하였다. 아울러 절수지의 조 100두형과 민결면세지는 전결세의 수취권을 국가로부터 위임받은 수세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양자의 구분은 사실상 모호했다. 18세기 중엽 이후 궁방전은 유토(有土)면세와 무토(無土)면세로 분화되었다. 민결면세지와 조 100두형 절수지는 민인과 지방 수령, 궁방의 입장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윤정(輪定)·윤회(輪回)되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땅이 없는 면세지라는 의미로서 무토면세의 개념이 생겨났다.

1776년(정조 즉위)에는 규정 외로 보유하고 있는 궁방전을 조사하여 대대적인 출세(出稅) 조치를 단행하고 여러 궁방의 전결을 호조로 이속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를 통해 약 60,000결에 달하는 궁방전의 1/3~1/2 정도가 출세됨으로써 내수사(內需司)와 주요 궁방의 면세결은 크게 줄어들고 확정된 면세결총(免稅結總)은 이후 궁방전 운영의 한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아울러 ‘병신정식(丙申定式)’을 통해 무토면세지의 호조 귀속과 도장(導掌) 파견을 금지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도장과 궁차(宮差)의 파견을 통한 궁세(宮稅) 징수가 금지되고 각 읍 수령이 수취를 담당하여 호조에 상납토록 하자 내수사와 궁방은 토지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력을 크게 상실하였으며 호조로부터 상당 부분의 재원을 지원받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가 되었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까지의 궁방전 결수(結數)는 대략 33,000∼37,500여 결로 전국 총실결의 약 2.5% 정도에 해당하였으며 국가에서 세를 받아들이는 출세실결(出稅實結) 대비 4∼5%에 달하는 규모였다. 이들 궁방전의 대부분은 내수사(內需司)수진궁(壽進宮)·명례궁(明禮宮)·어의궁(於義宮)·육상궁(毓祥宮)·용동궁(龍洞宮)·선희궁(宣禧宮)·경우궁(景祐宮) 등 1사7궁(一司七宮)에 소속되었다. 1894년(고종 31) 개화파정권이 조세제개혁을 위해 실시한 갑오승총(甲午陞摠)은 탁지부의 지세 수입을 확보하기 위해 궁방전을 비롯한 각종 면세지에 출세를 단행한 조치였다. 당시 승총결(陞摠結)은 총 9,848결로 전체적으로 8% 정도의 출세실결이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궁방전의 무토면세가 폐지되었으나 유토면세 가운데도 궁방이 수조권만을 가지는 토지, 즉 제2종 유토면세가 그대로 유지되면서 이후 국유지 분쟁의 불씨를 제공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김용섭, 『조선후기농업사연구』, 일조각, 1970.
  • 송양섭, 『조선후기둔전연구』, 경인문화사, 2006.
  • 이영훈, 『조선후기사회경제사연구』, 한길사, 1988.
  • 도진순, 「19세기 궁장토에서의 중답주와 항조-재령 여물평장토를 중심으로」 『한국사론』 13, 1985.
  • 박준성, 「17, 18세기 宮房田의 擴大와 소유형태」, 『한국사론』 11, 1984.
  • 송양섭, 「정조의 왕실재정 개혁과 ‘궁부일체’론」, 『대동문화연구』 76,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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