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상궁(毓祥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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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생모이자 숙종의 후궁이었던 숙빈최씨의 제사궁(祭祀宮).

개설

숙빈최씨(淑嬪崔氏)에게 제향하고 그 재물을 관리하기 위한 제사궁이다. 경복궁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영조가 즉위한 1725년에 건립되었다(『영조실록』 1년 12월 23일). 1870년(고종 7)에 희빈장씨(禧嬪張氏)·정빈이씨(靖嬪李氏)·영빈이씨(暎嬪李氏)·의빈성씨(宜嬪成氏)를 육상궁 내에 모셨다가(『고종실록』 7년 1월 2일) 1896년(고종 33) 다시 제자리로 돌렸다.

1908년(융희 2)에는 황실의 제사 및 의례를 축소한다는 명목하에 육상궁에 연호궁(延祜宮)·저경궁(儲慶宮)·대빈궁(大賓宮)·경우궁(景祐宮)이 함께 모셔졌다(『순종실록』 1년 7월 23일). 1929년에는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덕안궁(德安宮)까지 들어왔다. 이후 7명의 신위를 모셔 칠궁(七宮)이라 불리게 되었다.

위치 및 용도

육상궁은 숙빈최씨의 제향과 그 재물을 담당하는 제사궁이다. 한성부 북부 순화방에 있었다. 현재의 행정 구역으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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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및 현황

1725년(영조 1) 숙빈최씨의 아들인 연잉군(延礽君)이 경종의 왕세제(王世弟)로서 왕위에 올랐으니 바로 영조이다. 숙빈최씨는 1670년(현종 11) 최효원(崔孝元)의 딸로 태어나 침선비(針線婢)로 궁궐에 들어와 숙종의 후궁이 되었고, 1718년(숙종 44) 창의궁(彰義宮)에서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자신의 잠저(潛邸)이자 숙빈최씨의 궁가였던 창의궁 내에 사당을 건립하려 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경복궁 북쪽에 사우(祠宇)를 세웠다.

숙빈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은 1725년(영조 1)에 건립되었으며 처음에는 숙빈묘(淑嬪廟)라 했다. 이후 영조가 숙빈을 추숭하면서 1753년(영조 29) 묘호(廟號)를 육상궁으로 하였다. 영조는 재위기간 수백 번에 걸쳐 육상궁에 행행하여 숙빈최씨에 대한 효성을 나타내었다. 또한 영조의 육상궁 설치는 국왕이 사친(私親)들을 추숭하는 모범 사례가 되기도 하였다.

1870년(고종 7) 고종은 각 제사궁을 한곳에 모아 별묘(別廟)를 조성하였다. 이때 희빈장씨·정빈이씨·영빈이씨·의빈성씨의 신위를 육상궁 내로 옮겼다. 육상궁은 1882년(고종 19) 8월 1일의 화재로 건물과 위패가 모두 소실되었다가 복구되었다. 복구 과정에서 옮겨 봉안되었던 네 후궁들의 신위는 1896년(고종 33) 다시 각각의 제사궁으로 옮겨졌다.

1907년(융희 1)에 궁내부령으로 내수사(內需司)와 궁장토의 도장(導掌)을 폐하면서 육상궁 소속 토지도 제실 재산 관리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1908년(융희 2)에는 왕실의 제사 및 의례를 축소한다는 명목하에 육상궁으로 다시 각각의 신위를 옮겨 모셨다. 영조의 후궁이자 효장세자(孝章世子)의 생모인 정빈이씨의 연호궁, 선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원종의 생모인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저경궁, 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생모인 희빈장씨의 대빈궁,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綏嬪朴氏)의 경우궁이 옮겨 왔다. 1929년에는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의 덕안궁까지 들어오면서 7명의 신위가 모셔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곳을 칠궁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현재 서울특별시종로구 궁정동의 칠궁이 이곳이다.

형태

현재 육상궁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된 사당이다. 연호궁의 신위를 같이 모시고 있다. 육상궁 앞에는 동서각(東西閣)과 배각(拜閣)이 있고 나지막한 곡담이 이들을 둘러싸고 있다. 왼쪽으로 네 채의 사당이 앞뒤로 각기 독립하여 서로 접하여 서 있다. 이들 건물 앞쪽에 재실(齋室)과 정문이 있다.

참고문헌

  • 이왕무, 「영조의 私親宮·園 조성과 행행」, 『장서각』15,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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