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선복사(具善復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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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년(정조 10)에 발생한 구선복의 역모 사건.

개설

정조대 전반기에 무종(武宗)이라 불릴 정도로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구선복(具善復)이 상계군(常溪君)을 왕으로 추대하는 역모를 꾀하다가 제거된 사건이다. 이를 계기로 정조는 군사권 장악의 걸림돌을 제거하고 확고하게 정국을 장악할 수 있었다.

발단

1786년(정조 10)에는 5월에 문효세자가, 9월에 의빈성씨가 사망하였고, 11월에 은언군(恩彦君)의 아들인 상계군이 사망하는 등 연이어 왕실에 상사(喪事)가 발생하였다. 상계군의 외조부인 송낙휴(宋樂休)는 이 죽음에 김상철(金尙喆)·구선복 등이 관련되었다고 고변하였다(『정조실록』 10년 12월 5일). 이후 관련자들을 심문하면서 상계군 자살 사건은 상계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던 반정(反正) 모의 사건으로 변화하였고, 그 핵심에 구선복 부자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경과

구선복의 역모에 가담한 사람으로는 김상철의 서자이자 구선복의 사위인 김영진(金寧鎭)이 있었고, 김상철과 김우진(金宇鎭)은 모의를 알고도 고하지 않은 정황이 드러났다(『정조실록』 10년 12월 10일). 정조는 핵심 인물인 구선복 부자를 처형하였고, 김우진·김영진은 외딴섬으로 유배시켜 핵심 협력자를 제거했다.

구선복은 영조대 후반 이래로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김구주(金龜柱) 등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독보적인 ‘무종’으로서 이들 세력에게 군사력을 제공하였다. 때문에 왕 역시 섣불리 배제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사실 구선복은 임오년(1762) 당시에 뒤주 속에 갇힌 사도세자를 희롱하는 등 막중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두려워하고 있었다. 게다가 즉위 후 홍인한·정후겸 등 관련 있는 주요 척신을 단죄하는 정조의 역적 토벌 방향이 구선복의 의구심을 증폭시켰다. 이들을 단죄한 이유는 정조 즉위와 관련된 것이었지만, 그 근저에는 임오화변 당시 그들의 반(反) 세자 행적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구선복은 정조가 지금까지는 자신을 대우해 주었지만 언젠가는 임오화변 문제로 자신을 제거할 것이라고 의심했고, 이에 대처하기 위해 신하의 분수를 벗어나 후사(後嗣)의 확정에 개입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것이 여의치 않자 반정까지 모의한 것으로 보인다(『정조실록』 10년 12월 9일).

정조는 구선복 제거에 대단히 주도면밀하면서도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정조는 본래 구선복에 대해 임오화변의 죄 때문에 원한이 깊었으나 그가 『명의록(明義錄)』의 즉위 의리, 즉 정조의 즉위를 반대한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즉위 후에도 원융(元戎)의 대우를 하면서 사적 원한을 억제했다. 그러나 동시에 정조는 벌열 무신(武臣)에게 좌우되지 않는 무력 기반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구선복의 반역 시도가 드러나자 전격적으로 그를 제거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정조는 장용영(壯勇營)을 확대 개편하는 군제 개혁에 주력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 『현고기(玄皐記)』
  • 김성윤, 『조선 후기 탕평 정치 연구』, 지식산업사, 1997.
  • 최성환, 「정조대 탕평 정국의 군신 의리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