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廣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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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가면, 혹은 탈놀이, 인형극 같은 연극이나 줄타기, 땅재주 같은 곡예, 또는 판소리를 하는 배우(俳優).

내용

광대(廣大)는 나례희에서 사용하는 가면을 의미하며, 『조선왕조실록』에서 광대는 딱 한 번 출현한다. 1616년(광해군 8) 8월 20일에 나례청의 잡상(雜像)인 주지(注之, [注叱]) 즉, 사자탈과 광대 등의 물품 수리에 관한 논의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조선왕조실록』의 광대는 나례희에 사용되는 가면이나 탈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변천

광대는 원래 탈을 의미하는 말이었으나, 점차 탈놀음을 하는 사람으로 변하였고, 공연 문화를 이끄는 주체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유득공이 쓴 『경도잡지』의 「유가조(遊軻條)」에 “광대는 창우이다[廣大者 倡優也].”라는 글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탈놀음을 하는 사람들을 광대나 창우(倡優)라고 부른 것을 알 수 있다. 광대는 우리의 토속어를 한자식으로 표현한 것이고, 창우는 중국식 표현이다. 광대를 가리키는 용어에는 창우 외에 배우, 재인(才人), 희자(戱子), 그리고 창부(倡夫) 등이 있다.

창우는 조선시대에 공연 문화를 이끌었던 무계(巫係) 출신의 남성을 말하며, 전문적으로 공연만을 담당하는 전문 공연 집단이다. 이들은 공연 종목에 따라 광대, 재인, 무동(舞童), 고인[工人] 또는 고인(鼓人) 등으로 나뉜다.

광대는 창우의 역할 중 연극적인 것을 담당하였으며, 이들은 소릿광대와 고사광대, 줄광대, 어릿광대로 나뉜다. 소릿광대는 판소리를 주로 하는 사람을 지칭하고, 고사광대는 무의식(巫儀式)에서 무당이 아닌 무부나 광대가 단독으로 고사를 주도하는 사람을 지칭하나, 소릿광대와 고사광대는 생업을 위해 겸하기도 하였다. 줄광대는 재인의 여러 기술 중에 줄타기가 전문화되어 형성된 것이다. 줄 위에서 줄놀음을 하면서 어릿광대와 함께 마치 판소리를 하듯이 서사적인 이야기를 이어간다. 한편 조선말에 판소리가 크게 성행하면서 광대를 판소리하는 자로 생각했으며, 신재효(申在孝)는 「광대가」에서 광대가 갖추어야 할 기본 요소로 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를 꼽았다.

재인은 좁은 의미로는 줄타기 곡예나 땅재주하는 사람을 지칭하며, 넓은 의미로는 『팔도재인등장(八道才人等狀)』에서처럼 창우 집단 전체나 화랑이패를 의미하기 때문에 개념의 혼란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

고인은 ‘고인(鼓人)’이나 악공인 ‘공인(工人)’으로 악기 연주자를 지칭한다. 판소리 「춘향가」의 사설 중에 “광대 부르고 고인 불러서…….”라는 사설이 나오는데, 이를 보면 이미 광대와 고인의 역할 분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관아의 잔치에 불려가서 기생의 무용 반주 음악을 연주하거나, 창우희에서는 줄광대의 반주와 무동의 춤 반주를 하였다. 그리고 굿 의식에서 무녀의 바라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무동은 무용을 주로 행하며, 광대나 재인, 고인과 같은 창우 집단의 어린 자식들로 이루어졌다. 어렸을 때는 무동을 하고, 커서는 재능에 따라 광대나 재인, 고인을 맡는다.

이렇게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을 통틀어 광대라 부르기도 하고, 그들 중 일부만을 광대라 부르기도 했다. 대체로 그 의미는 공연 문화를 담당했던 계층 전반을 의미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의의

광대는 국가적인 행사에서 공연을 담당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회의 분화와 함께 전문화되어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세분되었다. 이들에 의해 조선후기 공연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으며, 이들을 통해 전승된 전통 공연 문화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 이보형, 「倡優集團의 廣大소리硏究」, 『韓國傳統音樂論究』,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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