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현맹인(管絃盲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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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내연(內宴)에서 음악 반주를 담당했던 맹인 남성 음악인.

개설

관현맹인(管絃盲人)은 여러 궁중 잔치들 중 여성이 주빈인 내연에서 음악 연주 및 정재의 반주 음악을 맡았던 맹인 남성 악기 연주자들이다. 조선전기 음악 기관이 장악원으로 통합되기 이전인 세종대에는 관습도감에 소속되어 활동했으며, 주로 향악과 당악을 연주하였다. 이렇게 관현맹인이 주로 내연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관습도감에서 외연을 맡은 교방 공인과 대조를 이룬다. 관현맹인을 뽑을 때는 악공의 취재와 같이 특별한 절차는 없었다. 나이 어린 맹인을 뽑아 교육시켜서 진연에 썼다. 이들의 관직은 모두 임시직인 체아직(遞兒職)이었다.

담당 직무

궁중의 잔치는 왕과 왕세자와 같이 남성이 주빈이 되는 외연(外宴)과 내명부의 여성이 주빈이 되는 내연이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시대는 유교적 관습에 의해 남녀를 구별하는 관례가 있었다. 그 결과 중종대에 외연에서 여악(女樂)이 문제되었던 것처럼, 내연에서 남악(男樂)이 문제되었다. 따라서 내연의 음악과 정재는 원칙적으로 여기(女妓)에 의해 이루어져야 했다. 이때 여기의 습악 정도가 떨어질 경우, 앞이 보이지 않는 맹인 중에 악기 연주가 가능한 자로 하여금 악기 연주를 담당하게 하였다. 그들이 바로 관현맹인이었다. 즉, 관현맹인은 내연에서 관악기와 현악기를 연주하며, 음악을 연주하거나 정재를 반주했다.

관현맹인은 진풍정이나 궁중 진연의 내연에서 활동하였다. 먼저, 1630년(인조 8) 3월 20일에 대비전의 경수연으로 거행된 진풍정(進豊呈)을 기록한 『풍정도감의궤』의 진풍정과 관련된 기록을 보면, 헌선도와 수연장, 금척, 봉래의 등 아홉 종목의 정재명과 정재 반주를 했던 관현맹인에 관련된 기록이 보인다. 진풍정은 대비를 위한 내연이었기에 장악원의 남성 악공이 연주할 수 없었으며, 그 대신 관현맹인으로 하여금 연주하게 한 것이다.

다음으로 『갑자진연의궤』에는 1744년(영조 20) 10월에 경희궁 광명전에서 거행된 중궁전과 대왕대비전을 위한 진연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때 관현맹인 13명은 피리 5명, 대금 2명, 해금 2명, 거문고 1명, 비파 2명, 초적(草笛) 1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를 보면, 피리와 대금과 같은 관악기와 해금, 거문고, 비파와 같은 현악기를 관현맹인으로 하여금 연주하게 한 것을 알 수 있다.

변천

관현맹인은 조선전기 음악 기관이 장악원 체제로 통합되기 이전에는 관습도감에 속하였다. 1430년(세종 12)에는 관습도감에서 관현맹인을 18인 선발했는데, 재주가 취할 만한 사람은 4, 5인에 지나지 않고, 그 나머지는 모두 처음 배워서 익숙하지 못했다. 그 후 1447년(세종 29)에 의정부에서 관현맹인의 폐지를 요청하며, 관현맹인은 기녀가 사죽(絲竹)과 장고(杖鼓)를 배우지 못하였을 때에 궁중의 잔치와 제향을 위해 부득이 설치했는데, 이미 기녀가 향악과 당악을 배웠기에 관현맹인이 필요 없다고 하였고, 그 의견대로 잠시 폐지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29년 4월 9일). 세조대 이후에 관현맹인은 장악원에 소속되어 내연에서의 음악 반주를 담당하였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에 잠시 폐지되었다가 1651년(효종 2)에 복설되었으며, 영조대를 거쳐 조선말기까지 존재하였다(『선조실록』 39년 6월 11일).

의의

관현맹인 제도는 조선전기부터 시행되어 조선시대 내내 지속되었다. 맹인을 궁중의 악사로 쓴 배경은 “옛날의 제왕은 모두 장님을 사용하여 악사를 삼아서 현송(絃誦)의 임무를 맡겼으니, 그들은 눈이 없어도 소리를 살피기 때문이며, 또 세상에 버릴 사람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라는 박연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관현맹인은 조선시대에 사회적 구제의 차원으로도 생각해볼 수 있으며, 유교적 관습에 의해 생겨난 제도로 볼 수도 있다.

참고문헌

  • 송방송, 『증보 한국음악통사』, 민속원, 2007.
  • 송방송, 「掌樂院과 宮中樂人 연구-17세기를 중심으로」, 『한국음악사연구』, 영남대학교출판부,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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