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창(官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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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관아의 곡식과 기물을 보관하던 창고.

개설

관창(官倉)은 조선시대 정부관서와 지방관아에 속하여 군기, 잡물을 보관하던 창고를 일컫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각종 행정 비품을 보관하는 창고 외에 조세곡(租稅穀)을 저장하고 재정 경비로 활용하는 곡물창고를 관창으로 칭하는 사례가 많이 보인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왕조는 건국 초부터 성리학적 이념에 입각하여 시장에서의 상업 활동을 억제하고 농업을 장려하는 무본억말(務本抑末) 정책을 시행하였다. 각 군현의 토산 현물을 수취하여 국가 재정에 활용하는 조세물류정책이 오랫동안 강고하게 유지되면서 정부관서와 지방관아에 현물 재원을 보관하는 관창이 조선전기부터 운영되고 있었다.

서울에는 호조의 전세곡을 수취하는 광흥창(廣興倉)과 풍저창(豊儲倉), 군량미를 저장하는 군자감(軍資監) 창고가 한강변에 설치되었다. 또한 각사자판(各司自辦)의 원리 하에 각 아문에서 개별적으로 거두어들이는 세곡[位田稅]과 공물(貢物)을 보관하는 부속창고가 들어서 있었다. 세종대 국용전제(國用田制)를 시행하면서 정부관서에 납입되는 세곡을 호조의 부속창고에서 일괄 수취하여 배분하는 조치가 취해졌으나 이후에도 각 아문에서는 여전히 부속창고를 통해 현물 재원을 출납하였다.

한편 지방에는 고을마다 주창(州倉)·읍창(邑倉)·의창(義倉)을 설치해 두고 지방 재정에 활용하는 한편 흉년에 대비하였다. 또 서울로 연결되는 해운과 수운의 주요 결절지에 조창(遭倉)을 설치하여 세곡을 상납하는 데 활용하였다.

이처럼 조선전기부터 국가의 현물 재정을 뒷받침하는 관창이 다양한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다.

조직 및 역할

창고는 기본적으로 물류의 수급을 조정하고 보관과 집적을 통해 가격을 조절하는 기능이 있다. 조선시대 관창은 현물 위주의 재정구조 하에서 조세물류의 수취와 저장·운송의 중간기지로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관창은 그 자체로 정규세원을 관리하고 출납하는 재정기구로서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중앙과 지방에 납입되는 세곡은 명목에 따라 보관 장소가 구분되었으며, 회계문서도 달리 작성되었다.

중앙의 광흥창, 풍저창, 군자감으로 들어오는 전세곡은 호조에서 관리하였지만, 왕실 수요 물품 조달을 담당하는 공상아문(供上衙門)을 비롯한 정부관서와 지방관아의 곡물은 해당 관서에서 관리하고 회계 처리하여 매년 왕에게 보고되었다.

조선후기 진휼과 재정 보용을 위해 지방에 설치된 대규모 환곡창과 각종 민고 역시 회계장부를 통해 재원의 출납이 관리되었다. 관창에는 보통 회계 처리와 문서 수발, 곡식 출납을 담당하는 하급 관원인 감관(監官)·색리(色吏)·서원(書員)·고직(庫直)을 두었으며, 곡식의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군사를 두고 번을 서게 하였다.

변천

관창의 운영은 16세기 이후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창고곡을 대여할 때 원곡(元穀)만 상환하는 방식에서 모곡(耗穀)의 손실분을 감안하여 이자분을 더 걷는 방식으로 변화되었다. 창고에 저장된 곡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좀먹고 썩기 마련이었기 때문에 ‘빛갈이[改色]’를 위해서라도 곡식을 민간에 대여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원곡을 회수하기 어려워 재원이 결핍되는 경향이 나타나자 모곡의 이자분을 거두어 원곡의 손실분을 메우고 일부는 원곡에 포함시켜 곡수를 늘려나가는 조치가 취해졌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중앙관청뿐 아니라 지방관아에서도 이처럼 원곡의 이자분을 회록(會錄)하는 방식을 통해 경비를 충당하는 흐름이 확대되었다.

둘째, 중앙과 지방에 다양한 창고들이 새로이 설립되었다. 대동법 시행 이후 토산현물을 미(米)·포(布)·전(錢)의 대동세로 바꾸어 거두면서 중앙으로 상납되는 현물·금속화폐의 양이 늘어나 선혜청의 부속창고들이 한강변에 다수 설치되었다. 또 훈련도감을 비롯한 신설군문이 늘어나면서 관할창고가 도성 안팎에 증설되었다. 지방의 경우에도 감영이 유영제(留營制)로 바뀌면서 영문에 속한 부속창고들이 설치되었다. 여기에 대동법 시행 이후 대동저치미를 기반으로 재정 원리가 재편되고 기타 세원을 창출하려는 지방관아의 노력이 전개되면서 사창(司倉)·민고(民庫)와 같은 관창들이 경쟁적으로 형성되었다.

셋째, 18세기 무렵부터는 지방의 주요 거점 지역에 원주별창(原州別倉), 원산창(元山倉), 나리포창(羅里鋪倉), 포항창(浦項倉), 산산창(蒜山倉), 교제창(交濟倉), 삼남제민창(三南濟民倉)과 같은 대형 진휼창을 설치하여 인근 지역의 구휼을 책임지도록 하였다.

이처럼 조선후기 들어 전곡(錢穀)을 보관하고 출납하는 관영 창고들이 전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으며, 창고곡을 대여함에 있어서도 원곡에 이자분을 더하여 수취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곡물을 대여하는 방식은 재정 보용에 도움이 되었지만, 환곡을 민간에 분급하는 양이 절대적으로 많아지면서[加分, 盡分] 환곡이 부세화되는 폐단을 야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곡(稅穀)이 집결되는 조창과 고을의 해창(海倉), 환곡이 분급되는 읍창 주변으로 조선후기 포구상업이 발달하고 장시망이 형성되는 등 유통경제가 활성화되는 흐름도 한편으로 감지되고 있었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김현구, 「조선후기 지방 관창 운영의 사례(上)」, 『역사와 세계』 14, 효원사학회, 1990.
  • 김현구, 「조선후기 지방 관창 운영의 사례(中)」, 『역사와 세계』 15·16, 효원사학회, 1991.
  • 김현구, 「조선후기 지방 관창 운영의 사례(下)」, 『역사와 세계』 17, 효원사학회, 1993.
  • 송찬식, 「이조시대(李朝時代) 환상취모보용고(還上取耗補用考)」, 『역사학보(歷史學報)』 27, 역사학회, 1965.
  • 오영교, 「조선후기(朝鮮後期) 지방관청(地方官廳)의 재정(財政)과 식리활동(殖利活動)」, 『학림(學林)』 8,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1986.
  • 최주희, 「18세기 후반 관창운영(官倉運營)의 변화와 사설창고(私設倉庫)의 등장」, 『녹우연구논집(綠友硏究論集)』 41, 이화여자대학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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